▲ 노무현 대통령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그런데 한판 싸움이 있었으면 당연히 승자와 패자가 있어야 하는데 이번 싸움은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청와대 법무부 검찰 등 당사자 모두 얻은 것에 비해 잃은 것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공직기강을 확립하고 부패방지위원회 산하에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설립하는데 검찰 반발을 무력화시키는 이속을 챙겼다. 강 장관도 청와대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검찰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잃어버린 검찰에 대한 장악력도 되찾았다는 평가도 받았다. 송 총장은 자신의 오른팔인 대검 중수부를 존속시키는 실리를 얻었다. 어찌보면 모두가 자존심을 구겼지만 실속을 챙기는 윈윈 게임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은 이번 싸움에서 서로 돌이키기 힘든 치명상을 입었다. 언론들은 싸움의 가장 약한 고리로 송 총장을 지목, 패배자로 부각했다. 싸움의 결과를 대통령-법무장관-검찰총장이라는 고전적인 서열로 분석했기 때문이다.
이번 싸움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왜냐하면 노 대통령은 지나친 승부근성 때문에 내뱉은 말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개혁성’에 흠을 냈기 때문이다. 바둑으로 치자면 한집 승부에 집착, 대마가 위태로워진 형국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15일 국무회의를 시작하자마자 “여론몰이식이나 투쟁으로 관철하려는 흐름이 있다”고 송 총장을 비난하면서 “검찰총장 임기가 정부 정책에 강한 발언권을 행사하라고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총장 임기까지 거론했다. 때문에 1년 가깝게 임기가 남아있는 송 총장이 사표를 낸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가시돋힌 말은 국민들이 검찰독립과 공비처에 대한 회의를 갖게 만들기 충분했다. 특히 노 대통령이 법으로 보장된 총장 임기를 들먹여 “대통령이 대선자금 수사 때문에 검찰을 싫어한다”는 항간의 소문이 틀리지 않을지 모른다는 관측을 제공했다.
노 대통령은 향후 탄생할 공비처에 대한 당위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과거 김대중 정부 시절 공비처 설립은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됐던 일이었고 한나라당도 동의했던 일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대검과 충분한 협의 없이 사정의 중추기능을 감정적인 이유로 대검 중수부에서 공비처로 옮기려 한다는 인상을 줬다.
▲ 강금실 법무장관 | ||
송 총장 역시 대검 중수부를 존속시키는 실익을 얻었지만 잃은 것도 적지 않다. 막말을 한 덕분에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착오적 인물’이라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수부 축소 폐지도 시간문제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송 총장이 지난 14일 “내목을 치겠다”는 발언을 한 자리는 수도권 검찰간부 신고식이라는 내부 행사였다. 하지만 그날 검찰이 “차렷 경례라는 권위주의적 구령없이 행사를 진행한다”고 발표해 일부 기자들이 행사를 취재중이었다. 송 총장은 이날 출근길에 중수부 폐지 보도에 대해 묻는 기자 질문에 “그런 일을 어떻게 쉽게 말할 수 있느냐”라며 신중함을 보였지만 두 시간 뒤 행사에서는 과격발언을 했다.
송 총장은 이번 발언으로 얻은 것에 비해 잃은 것이 크다. 그중 가장 손해가 큰 것은 중수부 폐지 등 법무부의 개혁론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불가능해졌다. 노 대통령이 “중수부 폐지는 법무부와 검찰이 해결할 문제며 청와대는 어떤 입장도 없다”는 말은 법무부 개혁을 청와대 등 정치권과의 접촉으로 막으려는 시도를 겨냥한 말로 풀이된다. 또 검찰 의사를 간접적으로 청와대에 전달해왔던 친검 인맥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앞으로 검찰은 중수부 폐지를 법무부하고만 논의하게 됐다.
하지만 송 총장은 강 장관만 거론되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어 양측의 협의는 쉽지 않다. 송 총장은 강 장관이 검찰을 전혀 모르고 일부 검찰 간부들이 개혁을 빙자해 강 장관을 통해 검찰을 주무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송 총장은 강 장관과 사사건건 대립해왔다. 처음에는 노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강 장관 뜻대로 인사를 비롯한 검찰개혁이 진행됐다. 그러나 송 총장은 중수부의 대선자금 수사로 전세를 완전히 뒤집었다. 이번 검사장·검찰간부 인사에서 송 총장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송 총장이 중수부 폐지를 음모론으로 풀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검찰 안팎에서는 바둑의 고수로 수읽기에 능한 송 총장이 중수부에 무리하게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중수부가 없더라도 각 일선 지검과 지청 특수수사 강화만으로도 공비처와 승부해 볼만하다는 주장이다. 또 설립 이전부터 중립성을 의심받고 있는 공비처가 다음 정권에서 존재할지는 미지수다. 따라서 송 총장은 검찰개혁이라는 시대적 대세에 오히려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바람도 있다.
강 장관도 16일 기자회견에서 송 총장을 질책하고 이런 사태를 불러와 국민을 불안하게 한 자신의 과오를 사과했다. 송 총장도 강 장관 기자회견 후 사과를 했다. 외견상 기강을 바로 잡고 검찰과 협의하라는 노대통령의 지시를 충분히 따른 것으로 보인다. 중재자의 역할을 한 강 장관이 구겨진 체면을 세우는 순간이다. 그러나 강 장관은 송 총장의 의도된 발언 한방으로 코너에 몰렸다가 노 대통령 후광으로 위기에서 겨우 벗어난 것 아니냐는 정반대의 관전평도 나온다.
▲ 송광수 검찰총장 | ||
강 장관은 기자회견 때 중수부 폐지와 관련, 검찰개혁팀에서 중수3과를 폐지하는 방안이 가장 유력하게 논의되고 있다고 밝혔지만 검찰 간부들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더욱 나쁜 것은 강 장관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검사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법무부와 검찰이 협의해서 각종 현안을 추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강 장관이 앞으로 이런 불신의 벽을 뛰어넘어 노 대통령 지시대로 검찰과 중수부 폐지 등을 잘 처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미 정치권은 물론 청와대 인사들도 대부분 중수부 폐지에 공감하고 있어 강 장관이 검사들을 어떻게 설득할지 난감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배수진을 친 송 총장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법무부 개혁안을 막을 것이 분명해 청와대와 검찰에 끼인 강 장관의 입지는 더욱 위축될 전망이다. 청와대측은 이해찬 총리동의안이 통과되면 개각이 있을 예정이며 강 장관도 그 대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검찰과 한치의 양보없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가 강 장관 카드를 포기할지 주목된다.
이런 상황에서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18일 공비처에 기소권을 줘야한다고 검찰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이 같은 천 대표의 지원사격은 강금실 법무장관만으로는 검찰을 막을 수 없다는 여권의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검찰 개혁을 둘러싼 여권의 연합전선이 점점 공고해질수록 검찰의 반발은 거세질 전망이다. 결국 송 총장이 사표를 던지고 검사들이 노무현 정부에 반기를 드는 ‘검란(檢亂)’이 온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청-검-법 중수부 폐지 관련 삼각갈등 손익계산서 | |||
노무현 대통령 | 송광수 검찰총장 | 강금실 법무장관 | |
득 | .공비처 신설 가속화 .공직 기강확립 | .중수부 존속 .검찰 무력화에 대한 여론 환기 | .검찰장악력 회복 |
실 | .개혁성에 상처 .공비처 설립 정당성 훼손 | .검찰개혁론 명분 제공 .중수부 폐지 검찰개혁안 정치적 해결 불가 | .검찰의 불신 심화 .총리 임명 후 경질설 돌아 |
박태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