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 천국’ 일본의 잡지
우선 ‘듣고 흘려버리기’의 기본 테크닉이다.
첫 번째는 ‘무시하고 흘려버리기’다. 예를 들어 컴퓨터 작업이나 자료를 읽는 등 다른 일에 너무 열중하느라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분위기가 안 좋을 때 사용하면 오히려 상대방의 화를 돋우는 등 역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에 때와 장소를 잘 가려서 사용해야 하는 ‘고급 기술’이다.
두 번째는 ‘화제를 바꾸면서 흘려버리기’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어 선택이다. 뜬금없이 “그런데…”라며 노골적으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뿐더러 그냥 흘려버리려는 이쪽의 계획이 간파당하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언제 결혼할래?”라고 집요하게 묻는다면 “결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전에 결혼한 친구가 파리로 신혼여행을 가서…”라는 식으로 상대방이 원하는 주제를 받아들이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교묘하게 다른 쪽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세 번째는 ‘긍정하면서 흘려버리기’로, 그 자리에서는 “알았다”고 대답을 함으로써 시간을 버는 기술이다.
윗사람이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안 된다고 대답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이럴 때는 “알았으니 시간을 달라”고 해서 유예기간을 얻은 후 그 화제가 자연스럽게 잊히기를 기다리거나 다시 화제가 도마에 올랐을 때 “조금만 시간이 더 있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고 다시 유예기간을 연장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흘려버리기’의 기본적인 테크닉일 뿐 실전에서 활용하기 위해서는 때와 장소, 그리고 상대를 잘 가려야 한다.
그렇다면 때와 장소, 상대는 어떻게 가려야 할까. 일단 이야기의 내용과 상관없이 대충 흘려들어도 되는 ‘상대’가 있다. 기본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다시 이야기하는 사람이나 숨도 쉬지 않고 따발총처럼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충 흘려들어도 무방하다. 단 맞장구를 치거나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고 있다’는 태도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가 하면 대충 흘려버려도 되는 ‘일’도 있다. 현실적으로 주위에서 요구하는 일을 모두 완벽하게 처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럴 때는 우선순위를 정해서 중요한 일부터 처리하고 굳이 지금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나중으로 미룬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아예 손을 대지 않고 놔두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예를 들어 상사가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으로 넘치는 아이디어를 주체하지 못하는 성격이라면 그냥 상사가 스스로 꺼낸 말을 잊어버릴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또한 거래처나 상사로부터 쏟아지는 불만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기가 죽거나 겁먹지 말고 평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후 상대방이 한바탕 쏟아내고 약간 진정이 됐을 때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역으로 해결책을 물어 본인이 스스로 대답하게 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 중 가장 고급 기술은 ‘언행 불일치’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 말이나 단어에 받는 영향이 10%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나머지 90%는 목소리나 말투, 시선, 동작 등이라고 한다. 결국 ‘무엇을’ 말하는지보다는 ‘어떻게’ 말하는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무리한 요구를 할 때 말로는 “알았다”고 긍정적인 대답을 하면서 행동으로는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거나 고개를 살짝 젓는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