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 ||
크게 보면 박근혜 대표와 이명박 시장 및 손학규 지사가 ‘이전 반대’ 쪽에, 정동영 전 의장과 김근태 전 대표가 ‘이전 찬성’ 편에 서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만도 않다. 여권 내부에서, 야당 내부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싸움이 진행되는 탓이다. 특히 박근혜 대표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 누구보다 차기의 반열에 가까이 접근해 있는데다, 그의 결정이 수도이전 논쟁의 향배를 좌우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대표는 침묵중이다. 여야 간의 사활을 건 전쟁으로 확대되는 수도 이전 논쟁에 대해 뭐라 딱부러진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박 대표가 이와 관련해 밝힌 태도는 지난해 말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특별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것을 사과한 게 전부다.
박 대표는 지난 21일 한나라당 의원총회 인사말에서 “지난해 법 통과과정에 우리 실책이 컸다. 국가 중대사를 놓고 충분한 공감대 형성이나 의견수렴, 타당성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갖지 않았다”며 대국민 사과성 발언을 했다. “한나라당이 반성해야 하며, 다수당이었던 한나라당의 책임이 더 크다. 이런 점에서 한나라당은 (법을) 졸속 처리한 것에 대해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그 뒤 행동강령이 없다. 박 대표의 태도는 반대론이라기보다는 신중론에 가깝다. 왜일까. 그 해답은 유승민 의원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다. 유 의원은 수도 이전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대목에서 “충청표를 놓치면 차기 대선은 꿈도 못 꾼다”고 했다. 그 누가 떠들어도 유승민 의원은 안다. 대선에서 충청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유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충청권의 표심을 붙잡지 않으면 대권은 영원히 없다. 이회창 총재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에게 잇따라 진 이유는 충청표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당의 최고 브레인 중 한 명인 이한구 정책위의장도 비슷한 생각이다. 대구 수성 출신의 이한구 의장은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수도권 다음으로 반대 기류가 강한 영남 출신이면서도 선뜻 `반대’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권 전략은 큰 안목과 긴 호흡에서 봐야 한다. 지금 찬반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 여론 수렴이며 절차이며 과정이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유승민과 이한구, 이 두 브레인의 말을 종합하면 결론은 이렇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는 충청권의 회복불가능한 이반을 불러오고 이는 결국 한나라당을 영남당화해 집권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박 대표의 신중론은 단지 침묵이 아니라, 더 큰 그림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론 가운데 하나다. 박 대표는 지금 수도 이전 찬성 또는 반대를 떠드는 이들을 비웃으며 나름의 저강도전쟁을 수행하는 중이다.
박근혜 대표의 애매한 입장을 간파하고 그 허점을 파악해 발 빠른 행보를 보이는 이는 같은 한나라당 소속의 수도권 광역단체장들인 이명박 서울시장과 손학규 경기지사. 일단은 수도 이전으로 기득권 박탈을 우려하는 수도권 시민들의 정서에 편입해 부담 없이 차기 주자로서의 자리를 확보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기엔 이만한 이슈가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이 시장의 경우 이미 서울시청 앞 잔디광장 조성, 청계천 복원사업 등을 통해 대국민 인기몰이에 나섰다. 청계천 복원사업의 준공시점이 차기 대선인 2007년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런 이 시장이 신행정수도 이전문제 같은 민감한 이슈를 놓칠 리 없다. 행정수도 이전을 방치할 경우 이 시장은 수도권 공동화를 막지 못했다는 일각의 거센 비난 앞에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을 갖고 있다. 최근 한 언론에서 이명박 시장은 “서울시장은 법률적으로는 수도 이전을 막기 위한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시장의 이런 발언은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표 두 사람을 모두 타깃으로 하고 있다.
▲ 왼쪽부터 열린우리당 김근태 전 원내대표, 정동영 전 의장. | ||
여권에서는 김근태 전 원내대표가 수도 이전 싸움을 확전시킬 태세다. 그는 최근 개인성명에서 한나라당을 겨냥해 “대통령을 인정할 수 없다는 고질병이 도졌다”고 규탄했다. 탄핵쿠데타가 제1의 대선불복이고, 신행정수도 번복은 제2의 대선불복이란 말도 했다.
김근태 전 대표는 나아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들고 나왔다. 그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행정수도 이전은 정당한 것이고, 참여정부의 신행정수도 건설은 잘못된 것인지 답해 달라”며 박근혜 대표의 답변을 촉구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박근혜 대표를 친다’는 일종의 이박제박(以朴制朴) 작전이다.
여야 인사들 중 박근혜 대표와 더불어 가장 차기에 근접해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전 의장도 조만간 미국 방문길에서 돌아오면 수도 이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천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의장은 지난 2002년 대선 과정 등을 포함해 수차례에 걸쳐 “신행정수도 건설은 내가 2002년 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내놓은 공약으로 당시 (경선에서 이긴) 노 후보에게 채택해 달라고 건의했었다”고 강조해 왔었다. 정 의원은 이미 입장 정리를 끝냈다고 한다. 그의 한 최측근 인사는 “정 전 의장이 귀국 이후 행정수도 이전 문제와 관련해 분명한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수도 이전 전투는 대권 주자들의 전쟁 열기를 한층 더 고조시킬 전망이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