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문 LG 감독이 5월 1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에서 라인업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타순의 의미와 기능
타순은 일반적으로 상위타선과 중심타선, 하위타선으로 분류된다. 테이블 세터는 상위타선인 1번과 2번 타순을 표현하는 단어다. 득점에 필요한 ‘밥상’을 차린다는 의미에서다. 타석에 가장 많이 나서게 되는 1번 타자는 대부분 발이 빠르고 출루율이 높은 타자가 맡는다. 어떻게든 1루를 밟기 위해 좋은 컨택트 능력이 필요한 건 기본. 매 경기 가장 먼저 타석에 서기 때문에, 상대 선발 투수가 최대한 많은 공을 던지게 유도해야 하는 것도 숨은 임무다. 그래야 나머지 타자들이 그 투수의 컨디션이나 상대 배터리의 볼배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서다. 2번 타자도 1번과 비슷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만, 작전수행능력과 팀 배팅 능력이 좀 더 중요하게 고려된다.
중심타선인 3~5번은 ‘클린업 트리오’라고 불린다. 루상의 주자들을 깨끗하게 ‘청소’한다는 의미에서다. 당연히 타점을 많이 올리는 게 중심타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다. 3번은 장타력만큼 정확도도 중요하기 때문에 중장거리형 타자들이 많이 배치되고, 4번과 5번은 확실한 한 방이 있는 선수로 주로 구성된다. 6번 역시 장타력이 가장 중요한 자리다.
하위 타선인 7~9번 타순은 수비로 인한 체력적·정신적 부담이 많은 포수나 내야수가 주로 맡는다. 상대적으로 타격에 대한 압박감이 덜한 타순이라서다. 9번은 다음 공격이 상위 타선으로 연결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가장 타격이 약한 타자는 8번에 많이 배치되는 편이다.
두산의 클린업 트리오로 활약하는 김현수. 일요신문 DB
#1번·4번 압박감은 상상 초월
공격을 리드해야 하는 1번 타자와 공격의 핵인 4번 타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 해설위원은 “한 팀에 확실한 에이스와 마무리 투수, 1번 타자와 4번 타자가 존재한다면, 감독이 해야 하는 고민의 절반 이상이 줄어든다”고 했다. 삼성 류중일 감독은 올 시즌 초반 1번 타자감을 찾지 못해 고생했다. 4월 한 달간 1번 타순 타율이 9개 구단 가운데 최하위였다. 번번이 1번에서 공격의 흐름이 막혔다. 류 감독은 당시 “아무리 잘 치던 선수도 1번 자리에만 갖다 놓으면 이상하게 못 친다. 답답하다”고 했다. 결국 용병 야마이코 나바로를 1번으로 기용하기 시작하면서 해답을 찾았다. 삼성의 성적도 이후 쑥쑥 올라갔다.
4번 타자 역시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에 더 부담스러운 자리다. 내로라하는 스타 선수들도 4번 타자로 중용되는 순간 슬럼프를 겪는 일이 적지 않았다. 두산 김현수는 늘 3번 자리에서 활약하면서 리그 정상급 타자로 성장한 선수. 그러나 전임 김진욱 감독이 지난 시즌 막바지 4번 타자로 실험하기 시작하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김 감독은 포스트시즌에서도 ‘4번 김현수’ 카드를 고집하다 통하지 않자 결국 마음을 바꿨고, 이후 김현수의 방망이는 다시 터졌다.
따라서 수년간 붙박이로 활약하던 1번 타자와 4번 타자가 이런저런 이유로 팀을 떠나면, 새 선수들이 그 빈 자리를 메우기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롯데는 최고의 4번 타자였던 이대호가 일본으로 떠난 뒤 수많은 후임자를 찾아봤지만, 아직까지 적절한 대안을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다. 이럴 때 감독들은 전략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A 감독은 1번 타자로 키우고 싶은 유망주를 일단 부담이 덜한 2번 타순에 고정적으로 기용하며 때를 기다린다. 반대로 B 감독은 초반에 선수가 부진하더라도 계속해서 1번 타순에 밀어 넣고 자신의 자리에 익숙해질 시간을 준다. 어느 쪽이든 감독의 의도대로 될 확률은 반반. 결국은 성공하는 쪽이 정답이다.
삼성 나바로가 7월 23일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에서 스리런 홈런을 친 뒤 류중일 감독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점점 더 중요해지는 2번·6번·9번
현대 야구는 모든 면에서 갈수록 더 세밀해진다. 1번과 4번 못지않게 중요한 타순도 그만큼 더 많아졌다. 2번, 6번, 9번이 대표적이다. 특히 9번 타자는 최근 1번 못지않은 능력을 갖춰야 하는 타순으로 떠오르고 있다. 9번이 기대 이상으로 활약해 준다면, 그 팀은 9번-1번-2번으로 이어지는 ‘3중 테이블 세터’를 장착할 수 있다. 투수인 C 선수는 “개인적으로 승부처에서는 오히려 중심타선보다 9번 타자를 만날 때 더 껄끄럽고 집중하게 된다. 중심타선은 ‘이 타자만 막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9번은 ‘이 타자를 잡지 않으면 상위타선으로 연결된다’는 부담감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라며 “두산 정수빈처럼 1번 못지않게 발 빠르고 잘 맞히는 선수가 9번으로 나오는 팀은 아무래도 상대하기 더 어렵다”고 귀띔했다.
무엇보다 7~9번의 하위타순이 일제히 약하면 상대 투수에게 큰 힘을 주는 셈이 된다. D 감독은 “아무리 하위타선이라도 전혀 경쟁력 없는 선수들이 연속으로 들어서면, 9이닝 가운데 3이닝은 사실상 상대에게 ‘접어주고’ 싸운다는 의미와 같다”며 “타순의 역할과 별개로 일명 ‘쉬어가는 이닝’이 없도록 배치를 잘 하는 것도 감독의 의무”라고 했다.
롯데는 4번 타자였던 이대호가 일본으로 떠난 뒤 수많은 후임자를 찾아봤지만, 아직까지 적절한 대안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진제공=롯데 자이언츠
2번 타자는 1번 타자와 중심타자의 기능을 번갈아가며 수행해야 하는 포지션이라 어렵다. 한 점이 꼭 필요할 때 가장 할 일이 많은 자리이기도 하다. 발이 빠르고 출루에 능하면서 번트도 잘 대야 하고, 여차하면 직접 장타를 터트려 타점을 올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넥센 염경엽 감독은 올해 1번 서건창의 뒤를 받칠 2번 타자를 발굴하기 위해 스프링캠프 때부터 여러 후보를 놓고 저울질했다. 결국 낙점된 선수는 장타력과 콘택트 능력을 겸비하고 발도 빠른 주장 이택근이었다. 이택근은 박병호-강정호와 함께 ‘LPG 중심타선’으로 오래 호흡을 맞췄지만, 팀 배팅과 작전 수행 능력이 팀 내에서 가장 빼어난 타자라 3번만큼 2번 자리에도 어울렸다. 염 감독의 선택은 옳았다.
6번 타자는 사실상 중심타선의 연장이다. 백전노장 김성근 감독은 SK 감독 시절 “6번 타자는 또 다른 5번 타자이자 또 다른 1번 타자”라는 지론을 펼쳤다. “6번이 강하면 단 한번의 찬스로 타자일순하며 한 이닝에 대량 득점을 하는 사례가 많다. 두산이 강할 때는 6번부터 공격을 시작해 3번 김현수가 해결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중심타선이 강한 팀은 6번을 넘어 7번까지 득점 기회가 자주 돌아오기도 한다. 앞서의 D 감독은 “7번은 철저하게 클러치 능력에 초점을 맞춘 선수를 쓰거나, 대타를 많이 기용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타순도 감독 성향 따라… 김인식 ‘한번 정하면 쭉~’, 김성근 ‘그때 그때 달라요~’ 타순에는 감독의 전략과 전술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다. 기본적으로 라인업을 구성하는 원칙은 대개 비슷하다. 첫째는 팀별 투수별 상대성적 고려, 둘째는 타자의 컨디션 파악, 셋째는 상대투수에 대한 전략, 넷째는 흐름과 기세와 직감이다. 이 과정에서 감독의 성향에 따라 타순의 색깔도 달라진다. 반대로 김성근 감독은 최대한 타순을 바꿨다. 경기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경기 타순을 구상하고, 때로는 7~8개의 선발 오더를 만든 뒤 직감이나 미리 정한 원칙에 따라 하나를 골랐다. 김성근 감독은 “타순을 짤 때 고려해야 할 부분이 정말 많다. 예를 들어 타구 하나에 한 베이스를 더 가는 타자들이 많은 팀을 만나면 외야진도 수비 위주로 짰다. 반면 장타력이 있지만 기동력이 약한 팀을 만나면, 우리 수비수도 발은 느리더라도 공격력이 강한 타자로 구성했다”고 증언했다. 그만큼 세밀했다. 같은 라인업으로 치른 경기를 거의 찾기 힘든 시즌도 있었을 정도다. 두 베테랑 감독뿐만 아니라 다른 감독들도 나름의 원칙과 소신에 따라 타순을 정한다. kt 조범현 감독은 “상대 선발투수가 강하면, 좌완이냐 우완이냐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6이닝 이상 상대할 수 있는 타순을 구성한다. 그러나 상대투수가 약하면 상대 불펜투수를 공략하기 위해 대타와 대수비, 대주자 등을 생각하고 타순을 짠다”고 했다. 롯데 김시진 감독은 “투수출신 감독은 대개 좌-우-좌-우 지그재그 타선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승부처에서 상대 핵심 불펜 좌투수가 한 타자만 상대하고 내려가도록 하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확실한 주전선수가 부진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때는 감독들도 갈림길에 선다. 다시 감을 찾을 때까지 계속 믿고 경기에 기용하느냐, 혹은 잠시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해 휴식을 취하고 숨을 돌리게 하느냐를 두고 고민한다. 빙그레 시절 김영덕 감독은 최고의 4번타자 장종훈이 슬럼프에 빠지자 독특한 해결책을 쓰기도 했다. “한 타석이라도 더 들어서서 공 하나라도 더 보라”는 의미에서 ‘홈런왕’ 장종훈을 1번에 배치한 것이다. 결국 장종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을 되찾았고, 다시 4번으로 돌아왔다. 물론 감독의 성향과는 별개로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많은 감독들은 “상위 팀들은 타순의 변화가 심하지 않고, 바뀌더라도 한두 자리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하위 팀들은 시즌 중 선발 라인업은 물론 엔트리 변화도 많다”고 귀띔했다. 그만큼 확실한 주전과 백업이 갖춰진 팀과 그렇지 않은 팀의 상황은 천지차이라는 의미다. [은] |
샌프란시스코 포지 ‘황당 사건’ 4번이 3번 타순에… 적시타 치고 ‘도루묵’ “강정호를 6번 타자로 썼다가, 헷갈려서 자기도 모르게 5번으로 나가 버리면 어떡합니까.” 샌프란시스코 간판타자 버스터 포지. 박병호와 강정호는 소속팀 넥센에서 2년 넘게 나란히 붙박이 4번과 5번 타자로 출전해왔다. 류 감독은 “박병호가 타격하고 나서 바로 강정호가 나가는 게 습관이지 않나. 박병호 뒤에 강정호가 있고, 강정호 앞에 박병호가 있는 게 서로에게 편할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류 감독은 웃자고 한 얘기였지만, 실제로는 일리 있는 해석이기도 했다. 불과 1년 전 메이저리그에서도 선수가 자신의 타순을 착각해 타석에 들어섰다가 득점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메이저리그 정상급 타자 가운데 한 명인 버스터 포지(샌프란시스코)가 비운의 장본인이었다. 지난해 7월 열린 LA 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의 라이벌전. 샌프란시스코는 1회 선두타자 그레고 블랑코가 2루타를 치고 나간 뒤 마르코 스쿠타로의 희생 번트로 1사 3루 득점 기회를 맞았다. 타석에는 샌프란시스코 간판타자이자 3번 자리에 자주 기용됐던 포지가 나섰고, 포지는 기다렸다는 듯 우익선상 2루타로 가볍게 선취점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때 다저스 벤치가 술렁거리더니 돈 매팅리 감독이 달려 나왔다. 포지는 3번이 아닌 4번 타자라고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사실이 그랬다. 경기 전 샌프란시스코 벤치에서 심판과 다저스에 건넨 라인업에는 분명히 3번 자리에 포지가 아닌 파블로 산도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메이저리그 야구 규칙에는 ‘타자가 자기 차례에서 타격을 하지 못하고 다른 선수가 타격을 끝냈을 경우, 상대팀이 항의하면 원래 타석에 서야할 선수에게 아웃이 선언된다’고 명시돼 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부정위 타자’에 대한 조항이다. 당연히 포지의 안타와 타점은 모두 취소됐고, 타석에도 서지 못한 ‘3번 타자’ 산도발은 억울하게 아웃으로 처리됐다. 3번이 아닌 4번 타자로 다시 타석에 선 포지 역시 결국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나야 했다. 경기 전 자신의 타순을 숙지하지 않았던 포지의 겸연쩍은 실수였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