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내내 호방한 풍모를 보인 류근철 박사.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한 할아버지가 일반인들은 상상하기도 힘든 어마어마한 거액을 KAIST에 쾌척했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통장에 여윳돈이 578만 원만 돼도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 기자에게 이 할아버지의 기부는 충격 그 자체였다.
할아버지가 만나고 싶어졌다. 어떻게 그런 큰돈을 벌 수 있었는지 그리고 기부약정서에 사인할 때 정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는지 묻고 싶었다. 사실 개인적인 관심이 먼저였지만 기자라는 직업상 취재 욕심도 컸다. 인터뷰 요청 하루 만인 지난 21일 세종로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단일 기부금으로는 최대의 금액을 기부한 화제의 주인공, 류근철 한의학 박사(82)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팔순의 할아버지 목소리는 30대 초반의 기자를 압도했다. 사무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서는 호탕함과 세상을 향한 넉넉한 마음이 동시에 묻어났다. 기자가 만난 이 할아버지는 돈보다도 더 소중한 것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딩동.’ 사무실 초인종을 누르자 류근철 박사가 직접 문을 열며 반겼다. 문을 연 뒤 그가 처음 한 말은 ‘고맙습니다’였다. 세상에 대한 감사함이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사무실에는 골동품이 가득했다. 특이한 모양의 벼루와 붓부터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망원경, 저울도 있었다. 만들어진 지 1300년이 넘은 벼루도 있었고, 당나라 시대의 황태자가 쓰던 벼루도 있었다. 허준의 <동의보감> 원본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사무실 한 켠에 있었다. 한마디로 사무실이 하나의 작은 박물관이었다. 많은 골동품 중에 유독 벼루와 붓이 많은 이유는 류 박사의 어린 시절과 연관이 깊다고 한다.
류근철 박사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박사의 부모님은 천안 아우내장터의 시위를 주도했고, 이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아버님은 만세운동 당시 일본 관헌의 총에 맞은 뒤 도피하셨고, 어머니는 체포된 뒤 모진 고문을 받고 정신 분열증에 걸려 사실상 혼자가 돼버린나는 초등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했습니다. 재산을 늘리거나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림의 떡’이었죠. 당시 여름에는 보리 한 말, 가을에는 벼 한 말 주면 서당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는데 그것도 없어서 서당에 못 갔으니까요.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요. 부모님이 일본군을 피해 지금 행정구역상으로 충주시 노은면으로 숨어들었는데 그때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에 방과 후 2부 학생으로 등록하고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류근철 박사가 베푸는 것에 익숙한 이유도 이처럼 가난을 몸소 겪어봤기 때문이다. 특히 류 박사의 어머니는 가난했던 시절에 거지들이 밥을 달라고 하면 자신의 끼니를 나눠줄 정도로 심성이 고왔다고 한다.
불우했던 소년 시절을 겪은 류 박사는 청년이 되어서 한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류 박사가 한의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에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픔이 서려있다. 그가 청년이던 시절엔 학교 선생들이 ‘대한’이란 말을 쓰면 좌익 청년들에 끌려가 맞고 ‘조선’이란 말을 쓰면 우익 청년들에 끌려가 맞았다고 한다. 류 박사는 이런 모습을 목격하면서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도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한의학에 눈을 돌리게 됐다는 것. 남들보다 공부를 늦게 시작한 만큼 학구열은 더욱 뜨거웠다.
1956년에 경희대 한의학과를 졸업한 후 그는 개업을 미루고 공부를 계속했다. 공부하는 와중에 의료기기를 손수 발명해 특허를 내는 재능도 보였다.
▲ 카이스트에 기증할 고서와 골동품이 가득한 류박사의 사무실. | ||
류근철 박사가 서대문 로터리에 개업을 한 것은 1972년. 한의대를 졸업한 지 15년이 넘어서다. 이마저도 처음 몇 개월간은 적자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던 지역에 위치해 돈을 내지 못하는 환자들이 부지기수였던 것. 그는 이런 환자들에게 단 한번도 치료비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이를 이용해 공짜 진료를 받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들에게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즈음 그는 최초로 침술에 의한 제왕절개 수술 마취에 성공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재물을 바라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는데 재물이 모이기 시작했다. 후덕한 인심에 뛰어난 의술까지 더해진 때문이었다. 한의학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는 1976년 한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지 20년 뒤인 1996년에 모스크바대학에서 의공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러시아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류 박사는 침술기 관절치료기 등 의료 관련 분야 특허를 10여 건 갖고 있기도 하다.
그는 재산이 급격히 늘어났어도 한 번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10여 년 전부터 어떻게 하면 이 재산을 가치 있게 쓸까를 고민해왔다고 했다. 그러다 후학 양성에 사용되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기부를 하게 됐다는 것.
모교인 경희대에 기부할 생각도 했지만 과학이 발전해야 우리나라가 궁극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다는 생각에 KAIST를 선정했다.
사실 류근철 박사의 기부활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90년대 후반 모스크바 국립공대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의료시설이 부족한 한국 지방 각지를 돌면서 무료진료 활동을 펼쳤고, 고향인 충남 천안 천동초교에 사재 1억 5000만 원을 털어 학생과 주민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다목적 체육관, 게이트볼장, 골프연습장 등을 건립해 기증했다.
류근철 박사는 인터뷰 말미에 “기부약정서에 사인하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며 만류 하기도 했고 아내도 자식들 먼저 조금 주고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말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약정서에 사인한 그 날은 진짜 두 다리 쭉 뻗고 잤습니다.”
류 박사는 특히 “돈이라는 것은 귀신이 붙었다. 죽을 때도 가져갈 것처럼 집착해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해 욕심을 내면 돈에 붙은 귀신의 노여움을 산다”며 “향후 지인들을 모아 1000억 원의 기금을 조성해 다시 한 번 좋은 일에 사용하도록 할 것”이라고 또다른 계획을 털어놨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필드에 나가 골프를 친다는 류근철 박사.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정정한 이유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열정과 넉넉한 마음 때문으로 보였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