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일 신임 장관 임명장 수여식장에 입장하는 정동채 장관, 이해찬 총리, 정동영 장관(왼쪽부터). 청와대사진기자단 | ||
국회 임명동의안을 무난히 통과(6월29일)해 참여정부 2기 내각 수장(首長) 자리에 안착한 이 총리가 취임 초 부터 활발한 행보를 펼치며 청와대-내각-열린우리당으로 이어지는 여권내 ‘삼각 편대’의 중핵(中核)으로 부상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8일 이 총리를 지명할 당시 “대권과 무관한 실무형 인물인 점이 배경”이라던 정치권의 해석과 “대권에는 본래 관심이 없었다”는 당사자의 언급과는 사뭇 다른 기류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권내에선 노 대통령의 남다른 신뢰와 파격이라 할 만한 ‘50대 총리’, 5선 관록에 당정 핵심 포스트를 두루 거친 이 총리가 대권 주자로 부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의견이 많다. 여당 정책위 의장 세 번을 역임했고, 김대중(DJ) 정권 시절 교육부 장관을 지낸 경력에 비해 그동안 이 총리가 지나치게 ‘평가절하’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실무형’의 이미지가 강했던데다, ‘송곳’으로 상징되는 강한 소신과 개성 탓에 “보스형 보다는 참모형”이라는 평가가 많았던 사정에서다.
여권 관계자들은 특히 총리 기용을 계기로 이 총리가 ‘대중성 부족’ ‘참모형’이란 꼬리표를 뗄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정동영 통일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등 차기 주자들이 포진한 ‘파워 내각’을 이끌면서 이 총리의 대중적 인지도와 여권내 위상이 급상승하리란 점에 주목하고 있다. 여기에 여권내 최고의 ‘전략통’이자 국정-당무에 풍부한 경험을 갖춘 이 총리의 장점이 결합된다면 차기 주자로 손색이 없다는 분석이다. 이 총리가 여권내 대권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배경을 들여다 봤다.
지난 2일 저녁 서울 삼청동 총리 공관에서 열린 고위 당정 정책조정회의는 이 총리의 변화된 여권내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리였다. 10개월여 만에 다시 열린 이날 회의는 정부쪽에서 이 총리와 전 국무위원들이, 우리당에선 신기남 의장 천정배 원내대표 홍재형 정책위 의장 등 핵심 당직자 전원이 모두 참석했다. 청와대에서도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 김병준 정책실장, 문재인 시민사회수석, 이원덕 사회정책수석, 김영주 정책기획수석 등이 함께 해 명실상부하게 당(黨)-정(政)-청(靑) 수뇌들이 망라된 자리였다.
이 총리는 얼마전 까지 당 의장, 원내대표로 열린우리당을 이끌던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을 좌우로 거느린 채 시종 회의를 주도해 나갔다. 맞은 편엔 우리당 현 지도부인 신기남 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가 이 총리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 총리는 자신의 안방인 총리 공관으로 여권 핵심인사들이 총집결한데 만족한 듯 “이렇게 모이니 마음이 든든하고 풍성한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총리는 이날 회의를 ‘실질적으로’ 주재하며 참석자들에 여권내 새로운 ‘파워 맨’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정간 협의 시스템 개선이 주요 논제였던 회의에서 이 총리는 시종 맺고 끊음을 명확히 해 주목을 끌었다. 예를 들어 고위당정 정례화 문제를 놓고 참석자간 의견이 분분하자 “분기별 1회로 하는 것으로 하자”며 자신이 결론을 냈고, 의견을 달리한 참석자에겐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느냐”며 압박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이 총리의 회의 운영에 대해 “매끄럽고 부드러우면서도 결론을 확실히 짓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신기남 의장도 “속전속결로 회의를 주선하는 것을 보고 ‘역시 이해찬 총리답다’고 생각했다”며 혀를 내두른 후 “이 총리가 워낙 완벽주의자라 앞으로 당에서 좀 힘들겠다”는 소감을 피력했다는 후문이다.
이 총리가 이처럼 자신감을 갖고 당-정-청 관계를 주도하게 된 것은 여러 요인이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노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이란게 여권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우리당 내 노 대통령의 한 측근 의원은 “이 총리는 여권 내에서 노 대통령이 좋아하는 개혁성과 실무능력, 추진력을 겸비한 드문 인물이다. 특히 13대 때 국회에 함께 들어와 주요 정치 현안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해오면서 쌓인 신뢰 관계는 각별하다. 90년 3당 합당 직후 의원직 사퇴를 함께 결의한 것이나 14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노 대통령이 공천 탈락 위기에 놓였던 탈당까지 공언하며 이 총리 구명에 나섰던 것도 다 이같은 이유에서다. 이 총리는 노 대통령이 조건없이 믿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고 밝혔다.
우리당 내에서 노 대통령-이 총리 관계를 ‘체험적으로’ 가장 안다는 유시민 의원도 비슷한 언급을 했다. 유 의원은 최근 기자들에게 “대통령과 나의 관계보다 대통령과 이 총리의 관계가 훨씬 가깝다. 노 대통령은 총리 지명 전에도 정치적 판단이 필요할 때 이 총리를 자주 불러 상의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지난 6월30일 노무현 대통령(왼쪽)이 신임 이해찬 국무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환담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실제 노 대통령은 이 총리 취임 이후 유·무형으로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평가다. 노 대통령은 6월30일 청와대에서 이 총리에 임명장을 준 후 “신문, 방송이 ‘실세 총리’, ‘책임 총리’라고 하더라. 보통 이런 거짓말이 있느냐고 생각되는 기사가 많은데, 이번 것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추측 기사로는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이 총리에 내정(內政)에 관한 전권과 여권내 현안 조율의 책임을 맡길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 총리가 여권내 정무 기능의 중심에 설 수 있게 된데도 노 대통령의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총리는 국회 인준동의안 통과 직후 “청와대의 정무기능이 약해져 총리실에서 정무기능을 커버해야 하는 역할이 시급히 주어졌다. 당정 협의를 충분히 해서 당을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며, 야당에 설명을 잘 해서 공감을 얻도록 하는 역할을 하겠다”며 여권내 ‘올 라운드 플레이어’를 자임하고 나선 것도 ‘노심(盧心)’을 업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란 해석이다.
이 총리가 갖는 또다른 강점은 정동영 통일,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등 차기 대권 경쟁 상대들과 비교해 국정경험 면에서 크게 앞선다는 점이다. 이제 막 행정경험을 쌓기 위해 입각한 두 사람에 비해 이 총리는 이미 DJ정권 때 교육부 장관을 지낸 경험이 있는데다, 전무후무하게 여당 정책위 의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탓에 간접 국정경험도 풍부하다는 평가다. 이 총리의 ‘내공’은 ‘행정의 달인’이라 불리는 고건 전 총리가 “당쪽에서는 (총리로) 가장 적합한 인물 아닌가”라고 평가할 정도다.
더구나 통일부, 보건복지부라는 개별 부처 차원에서 ‘대권 수업’을 쌓는 정-김 장관과 달리 이 총리는 국정 전반을 이끄는 위치에 있으며, 특히 계선상 두 사람을 지휘-통솔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관료 출신인 우리당 한 의원은 “정부조직상 총리와 부처 장관의 역할은 ‘하늘과 땅 차이’다. 부처 장관이 어쩔 수 없이 부처 현안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반면, 총리는 그야 말로 국정 전반을 조정하는 권한을 갖기 때문에 ‘격(格)’이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총리 처럼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힘을 실어줄 경우 그 차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지냈고 차기 대권 주자라는 정동영 김근태 두 사람이 이 총리 밑에서 각료로 일하게 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일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총리가 이처럼 대권 주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현실화시키는데는 여러 난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 여권내 평가다. 제일 관건은 이 총리가 20%대에 머물고 있는 참여정부 국정지지도를 높히는데 얼마나 기여할 수 것인가다. 노 대통령이 이 총리에 권한을 대폭 부여한 만큼, 국정지지도가 얼마나 되느냐는 이 총리의 명운에도 곧장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권 한 관계자는 “이 총리가 지지율 급락의 원인이었던 여권내 난조를 해소하는데 제 역할을 해낸다면 차기 경쟁에서 누구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국정 혼선이 계속된다면 차기 대권은 물론이고 50대 초반인 이 총리의 남은 정치 역정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이 총리로선 지금이 절호의 기회이자 위기인 셈이다”고 말했다.
여권내에선 이 총리의 ‘인맥(人脈) 부재’도 핸디캡의 하나로 꼽고 있다. 우리당 일각에선 창당 이후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과 노선을 함께 했던 이 총리가 김 장관과의 협조-경쟁을 통해 당내 기반을 넓혀가고, 노 대통령의 후원 하에 당내 최대 계파인 친노(親盧)그룹의 지지를 얻는다면 차기 주자로서의 입지를 충분히 구축할 수 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