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옛 정권의 비자금이 구권 형태로 지방의 창고에 쌓여 있다’는 식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수법은 이미 오래전부터 언론 보도를 통해 여러 차례 피해사례가 알려진 전형적인 구권화폐의 사기수법이다. 그런데도 왜 자꾸 피해자가 나오는 것일까. 이번에 사기를 당한 김 씨는 11억 원의 돈을 허공에 날렸고 그 일당들이 사기혐의로 구속되고 지명수배를 받은 상황에서도 구권화폐의 존재만큼은 굳게 믿고 있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구권화폐의 존재를 맹신하게 만드는 걸까. 최근의 사건과 이전의 사건들 속에서 나타난 사기범들의 교묘한 수법을 파헤쳐 보았다.
서울 동대문의 한 다방에서 만난 피해자 김 아무개 씨는 요즘 술기운으로 버티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돈과 주변으로부터 빌린 돈 등 총 11억 원이라는 거액을 사기당한 이후 제 정신으로는 도저히 살아가기 힘들다고 했다. 이른 오전 시간이었는데도 김 씨는 소주 두 병을 마셨다며 “내가 바보였다”는 말을 술주정하듯 되풀이했다.
그가 구권화폐를 교환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속인 이 아무개 씨를 만난 건 지난해 3월. 이 씨는 김 씨에게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비자금 7000억 원이 구권으로 여수의 비밀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당시 이 씨는 “창고에서 빼낸 것”이라며 구권화폐 1억 원 뭉치를 김 씨에게 보여주면서 “11억 원을 주면 일주일 안에 60억~70억 원을 빼낼 수 있다. 이를 사채시장에 할인 판매하면 많은 차액을 얻을 수 있다”고 유혹했다는 것이다.
김 씨는 “11억 원을 투자하면 적어도 20억~30억 원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씨에게 두 번에 걸쳐 거금을 건넸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이렇게 거액을 쉽게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일련번호가 나란히 배열된 1만 원권 구권화폐 1억 원을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또 이 씨는 “헬기를 타고 지방을 다니는 고위층 인사인 ‘강 회장’과 연줄이 있다”는 등의 말로 김 씨를 현혹했다고 한다.
경찰 조사결과 피의자 이 씨는 고향 친구인 오 아무개 씨(48)와 점조직으로 구성된 강 아무개 씨(48), 박 아무개 씨(43), 이 아무개 씨(신원미상)와 미리 짜고 현금이 많아 보이는 피해자에게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를 맡았던 서울 금천경찰서 경제2과 김재원 형사는 “이들이 11억 원을 2억~3억 원씩 나눠가졌으며 강 회장이라고 불리는 강 씨가 가장 윗선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현재 이 씨와 박 씨가 구속되었고 강 씨를 비롯한 나머지 일당도 모두 수배 중이다”고 밝혔다.
한편 피해자 김 씨는 여수의 비밀창고에 쌓여 있는 구권화폐를 본 적조차 없었고, 이 씨가 언급한 ‘강 회장’이라는 사람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11억 원이라는 거액을 이 씨에게 건넸다는 점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더구나 구권화폐와 관련된 사기사건은 이미 여러 차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적이 있었다. 조금만 신중하게 처신했으면 사기범들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 씨는 “지금도 구권화폐의 존재를 믿고 있다”고 전했다. 11억 원을 공중에 날려 가정은 파탄나고 술에 의지해 살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여수의 비밀창고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는 것. 그는 이 씨가 자신에게 보여준 구권화폐가 가득 쌓여 있는 사진과 금괴로 가득 차 있는 창고 사진이 틀림없는 진짜라고 믿고 있다.
김 씨가 이렇게 황당한 사기를 당하고도 구권화폐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는 이유는 뭘까.
구권화폐 사기범들은 그럴듯한 이야기로 포장해 옛 정권의 비자금에 대해 털어놓는다. 이들은 “비자금은 적게는 수조 원 많게는 수십조 원에 달하는데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의 실세들이 조폐공사에서 통째로 빼돌린 것이다”라고 하는가 하면 “당시 시중에 유통되는 지폐와 일련번호가 같은 쌍둥이 지폐를 찍기도 했는데, 이런 돈들이 지방의 여러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식으로 접근한다고 한다. 또 “이런 창고는 일종의 본점 형태인 ‘본창’과 지점 형태인 ‘지창’으로 존재하며 창고 자체가 통째로 거래되는 일도 있다”고 피해자들을 현혹시킨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구권화폐를 바로 거래할 수 없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 피해자들은 점점 더 유혹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고 한다. ‘일련번호가 나란히 찍혀있는 지폐를 은행에 입금하면 은행이 당국에 신고하기 때문에 돈세탁을 할 수밖에 없다’거나 ‘옛 정권의 비자금은 구권뿐 아니라 금괴, 달러로도 존재한다’ ‘한국은 세계 돈세탁의 본거지다’라는 등의 말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돈세탁을 하는 과정에서 ‘구권과 신권을 섞기 위해 현금 다발을 선풍기에 날린다’는 말까지 한다는 것.
말로만 유혹하는 것도 아니다. 사진이나 실물 등도 이용된다. 구권화폐 사기를 오랫동안 담당해 왔던 서울 중부 경찰서 박병훈 형사는 “현금 상자를 쌓아 둔 택배회사 트럭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상자의 일부가 파손되어 구권의 일부가 삐져나온 것처럼 꾸며 피해자들에게 구권의 존재를 굳게 믿게 한 케이스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렇게 구권화폐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가진 이들은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구권화폐 소유자와 사채 시장의 큰손을 연결해주면 거액의 수수료를 챙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권화폐 소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과 사채 시장의 큰손은 모두 한 패인 경우가 많다.
박 형사는 “지금까지 구권화폐가 사채 시장에서 교환되는 거래가 성공한 케이스는 없는데 항상 거래 직전 단계에서 깨지고 만다”며 “이렇게 거래가 무산이 되면 사채 시장의 큰손들은 브로커에게 그때까지 들어간 금융비용을 물어내라고 요구한다”며 “이 경우 브로커 역할을 해온 인물은 몇 천만 원의 금융비용을 사채업자에게 건넨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구권화폐의 존재를 믿는 이들은 이 같은 비용도 훗날 거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억울하지만 감수한다는 것이다.
박 형사는 “이런 피해자들은 구권화폐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도 불법적인 거래에 개입돼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고를 하지 않는 게 태반이다”고 덧붙였다.
금천경찰서 김재원 형사 역시 “이미 많이 알려진 허황된 사기수법인 데도 쉽게 돈을 벌고자 하는 심리 때문에 사기범들의 별 새로울 것 없는 수법들이 계속 통용되고 있다”며 “지금 이 순간에도 돈세탁으로 거액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