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청부살해’ 이야기를 다룬 영화 <황해>의 한 장면.
“작업해서 보내버릴 사람이 있는데 좀 도와줘라.”
2013년 9월. 친구의 제안을 들은 A 씨(58)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청부 살인’을 직접 부탁 받았기 때문. 게다가 부탁을 한 친구는 B 건설사 대표 이 아무개 씨(54)로 지역에서 30년 넘게 알고 지내며 신뢰가 돈독한 사이였다. ‘30년 지기’의 진지한 부탁에 A 씨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A 씨는 청부 살인을 부탁할 만한 적합한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떠올린 인물이 김 아무개 씨(50). 무술 공인 20단인 김 씨는 중국에서 체육을 전공하고 고등학교 교사를 했던 ‘중국 동포’였다. 연변 공수도협회 간부직을 맡고 있기도 했던 김 씨는 2013년 중국에서 열린 체육 관련 행사에 참석해 A 씨와 인연을 맺었다. A 씨는 경기 수원 지역 무술단체 간부를 맡고 있었다.
김 씨는 2011년에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입국했는데, 마땅한 일자리를 잡기 어려워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씨와 A 씨의 부탁은 김 씨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이 씨가 제안한 청부 살인 성공보수금이 ‘4000만 원’에 달했기 때문이다. 부인과 대학생 아들까지 있는 김 씨 입장에선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 씨는 이중 3100만 원을 받고 청부 살인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이 씨가 김 씨에게 살인을 하라며 지목한 대상은 C 건설사 직원 홍 아무개 씨(40)였다. 이 씨에게 홍 씨가 눈엣가시가 된 배경은 지난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B 건설사와 C 건설사는 경기 수원 지역 일대의 신축 아파트 현장 토지 매입과 관련해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토지 매입 금액만 70억 원에 달하는 상황에서 두 건설사는 약간의 마찰을 겪게 된다. 토지 매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황해>의 한 장면.
결국 C 건설사 대표 경 아무개 씨(59)는 B 건설사 대표 이 씨에게 계약 파기를 통보했다. 그러자 이 씨는 또 다른 업체와 용역계약을 체결한 후, C 건설사를 상대로 “토지 매입 대금 5억 원을 C 건설사가 지불하기로 약정했다”며 2010년 수원지법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 B 건설사는 승소해 C 건설사로부터 5억 원을 받아내게 된다.
하지만 C 건설사도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2012년 C 건설사 대표 경 씨는 항소를 해 2심에서 승리했다. 이후 5년 가까이 이어진 고소, 고발 전으로 두 건설사 대표는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앙금이 쌓였다. 이때 경 씨 건설사의 소송 담당 직원이 바로 홍 씨였다.
게다가 홍 씨는 2012년 4월 이 씨를 횡령 건으로 추가 고소까지 한 상태였다. 이 씨는 홍 씨를 접촉해 수시로 회유를 시작했다. 항소심에서 5억 원을 다시 빼앗기게 된 것도 이 씨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이 씨는 홍 씨에게 “2억 원을 주겠다. 소송을 중단하라”고 제의했지만, 홍 씨는 응하지 않았다. 법원 판결 이후에도 이 씨는 자신이 살고 있던 아파트 등을 허위 이전하면서 돈을 주지 않기 위해 버텼다. 끝내 이 씨는 “내가 조직폭력배 출신이다. 당장 소송을 중단하라”고 홍 씨에게 협박까지 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회유책과 협박이 통하지 않자 이 씨는 홍 씨를 살해하기로 굳게 마음먹는다.
연합뉴스TV 방송 화면 캡처.
이후 김 씨는 약 4개월 동안 경 씨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경 씨의 동선을 파악하는 한편, C 건설사 사무실 일대를 배회하며 기회를 엿봤다. 그러다 지난 3월 15일, 경 씨가 퇴근할 시점에 결정적인 기회를 포착한다.
“경 사장님이시죠? 죄송합니다.”
김 씨는 오후 7시 18분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서울 강서구 방화동의 한 빌딩에서 사무실 문을 나서는 경 씨의 가슴과 옆구리, 목 등을 흉기로 수차례 찌른다. 경 씨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김 씨는 경 씨가 사망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 1시간쯤 지나 휴대폰으로 A 씨에게 ‘월척을 낚는 사진’을 전송한다. 청부 살인에 성공했다는 ‘암호’를 전송한 셈이다.
이후 경찰은 사건 현장 주변의 CCTV 등을 분석해 김 씨를 용의선상에 올렸다. 수사가 진행되고 7개월 후인 지난 15일, 경찰은 김 씨와 A 씨, 이 씨를 살인교사, 살인, 살인예비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중국 동포가 낀 청부 살해 사건 피의자들을 검거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범행 일체를 시인했으나 교사범 이 씨와 브로커 A 씨는 ‘혼만 내주라고 했다’며 혐의를 전면 또는 일부 부인하고 있다”고 전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200일 만에 ‘실마리’ CCTV 속 걸음걸이가… ‘너, 딱 걸렸어!’ 지난 3월 20일 오후 7시 20분. 서울 강서구 방화동의 한 건물에서 50대 남성이 흉기에 수차례 찔린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숨진 남성의 신원을 파악하니 C 건설사 대표 경 씨(59)였다. 치밀한 사건 현장과 재력을 갖고 있는 건설사 대표의 죽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경찰은 강서경찰서 강력 7개 팀과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2개 팀으로 수사 전담팀을 꾸렸다. 그때부터 범인을 쫓는 추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나마 경찰이 확보한 유일한 단서는 현장 인근 CCTV를 통해 범행 직후 급히 도주하는 것으로 보이는 한 인물을 찾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면에 나타나는 인물은 ‘점’으로 보일 정도로 작아 신원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인물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걸음걸이가 뭔가 특이했다. 인물이 발끝을 가운데로 모아 걷는 ‘내족보행’을 한다는 사실을 포착한 것이다. 경찰은 CCTV를 분석해 사건 현장을 배회하는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해서 발목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과학적인 방법도 동원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용의자의 키를 알아내는 신장계측을 했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는 걸음걸이 분석 등을 통해 용의자가 동일인인지를 측정했다. 이제 남은 건 용의자의 ‘얼굴’을 제대로 포착하는 것이었다. 그때 결정적인 증거가 경찰의 눈에 들어왔다. 내족보행을 하는 용의자가 3월 6일 오후 4시 52분쯤 공항동에 있는 전화국 앞을 걸어갔다가 2분 35초 만에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경찰은 2분 35초 안에 걸어서 왕복할 수 있는 주변의 현금인출기와 공중전화 등을 모두 뒤졌다. 이후 인근 빌딩에 있는 현금인출기에서 2만 원을 인출한 중국 동포 김 씨의 신원을 최종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공범이 있을 것으로 확신했던 경찰은 계좌추적을 통해 김 씨에게 송금한 사람을 역추적했다. 역추적을 하다 보니 돈 보낸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소송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포착했고, 김 씨의 통화기록과 금융거래 내역, 차량 이동경로 등을 분석해 b 건설사 사장 이 씨와 브로커 A 씨의 인적사항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200일 동안 미궁에 빠졌던 사건의 실체가 모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경찰은 지난 6일 김 씨를 안산 주거지에서 체포한 데 이어 8일과 10일 경기도 수원의 사무실과 주거지 등지에서 사장 이 씨와 브로커 A 씨를 차례로 검거했다. 경찰에 붙잡힌 김 씨는 처음엔 “방화동이 어딘지도 모른다”라고 부인하다가 결국 “돈을 돌려줄 수 있었다면 살인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모든 범행을 진술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살인 청부를 교사했던 이 씨와 A 씨는 “그저 혼만 내주라고 했다”며 범행 일체를 부인하는 상황이다. [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