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치열 전 장관이 혼외가족에게 충남 아산 땅을 주기로 약속한 이후 치매를 앓게 되면서 소유권 이전 소송에 휘말리게 됐다. 사진제공=우먼센스 | ||
소송을 제기한 김 아무개 씨는 “2003년 친자확인소송을 통해 친자로 확정된 후 김 전 장관이 재산의 일부를 주기로 약정했는데 이를 이행하지 않아 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 전 장관이 혼외 자녀에게 재산을 주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소송까지 당한 배경은 무엇일까. <일요신문> 취재 결과 김 전 장관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 전 장관과 혼외 자녀인 김 씨 사이에 얽혀 있는 숨겨진 가족사와 이번 재산분쟁의 내막을 자세히 파헤쳐 보았다.
김 전 장관과 혼외 부인인 H 씨(80)는 1954년경에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는 김 전 장관이 지방의 검사로 부임해 있을 때다. 김 전 장관은 H 씨와는 1남 1녀, 본부인과는 1남 3녀를 두고 있다. 소송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혼외 아들인 김 씨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알려졌다. 김 씨의 측근에 따르면 “김 씨는 김 전 장관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성인이 된 후에야 알게 된 것 같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김 전 장관이 혼외 부인인 H 씨 및 김 씨와 왕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 전 장관은 가족들 모르게 혼외 가족에게 물질적인 후원을 해줬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 씨는 2003년 친자확인 소송을 하게 된다. 그의 한 측근은 소송을 한 배경에 대해 “당초 받기로 한 재산을 김 전 장관 가족 측에서 차일피일 미루는 과정에서 법적으로도 친자식임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명예를 회복하고 물질적인 후원 역시 법적인 보장을 받고 싶은 마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얘기다.
친자확인 소송은 당연한 결과가 나왔다. 김 씨가 승소한 것. 그런데 문제는 법원을 통해 친자확인을 인정받으면 성을 바꿔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김 씨는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을 때까지도 어머니의 성을 따라 H 씨로 살아왔다고 한다. 김 씨는 특히 학교를 다니고 있는 자녀들의 성까지 바꾸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고통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측근에 따르면 김 씨는 영문도 모르는 부인에게 자신과 아이들의 성을 바꿔야 하는 상황을 설명해야 했고 갑자기 성이 바뀐 아이들도 학교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전학까지 시켜야 했다고 한다.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2000년 자신의 매제인 최 아무개 씨에게 명의신탁해놓은 땅을 김 씨에게 주기로 약속하고 각서와 증여 의도가 담긴 매매계약서까지 썼다”고 전한다. 김 씨 측의 주장대로 김 전 장관이 약속을 지켰다면 혼외 가족은 아버지의 재산 일부를 받고 아무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땅을 주기로 약속한 이후 김 전 장관이 그만 치매를 앓게 된다. 그리고 이후 건강이 악화돼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고 만다.
혼외 자녀에게 재산을 주기로 한 당사자가 치매를 앓게 되자 상황은 복잡해졌다. 김 전 장관의 가족 중 일부가 “땅을 줄 수 없다”고 나온 것이다. 이들은 ‘아버지가 땅을 주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병석에 있는 김 전 장관을 대신한 가족 중 일부는 재판 과정에서 “혼외 부인과 자녀들에게 서면으로 증여 의사를 표시한 적이 없다”며 “매매계약서 등이 있다고 해서 증여 의사가 있는 것으로 볼 순 없다”고 주장했다. 또 땅을 명의신탁받은 매제 최 아무개 씨도 그 땅에 대해 “김 전 장관으로부터 증여받은 내 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각서와 부동산 계약서에 대해 ‘증여의 의사를 표시한 서면이라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시했다.
김 전 장관은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면서 법조계에 들어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 차장, 37대 내무부 장관, 27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2000년부터는 AOS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취임해 부동산투자 및 관리업을 시작했으나 건강 악화로 일선에서 물러나고 현재는 장남에게 물려준 상태다.
김 전 장관은 1980년 당시 신군부에 의해 1000억 원대 재산을 빼앗겼다가 2001년 국가를 상대를 소송을 제기해 돌려받은 일도 있다. 당시 신군부의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는 “부정축재 정치인을 골라 낸다”는 이유로 김 전 장관을 연행하고 부인과 아들 명의로 된 서울과 경기도 소재 4만 4000여 평의 임야 등 부동산을 국가에 헌납하도록 강요했다.
이에 김 전 장관의 부인과 아들이 헌납된 부동산의 명의자가 부인으로 돼 있어 김 전 장관에게는 증여권이 없다는 데 착안해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재판부는 “당시 강압적인 사회·정치적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의사결정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재산을 돌려줘야 한다”고 판결했다.
김 전 장관은 국가로부터 되돌려 받은 재산 외에도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의 한 제보자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이 유신정권 시절 서울시에서 불하받는 형식으로 강남의 땅을 사들인 것으로 안다”며 “재산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규모인데, 신군부에서도 그의 명의로 된 재산은 찾기 힘들 정도로 모든 땅을 명의 이전해 놓았다”고 전했다.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김 전 장관이 혼외자녀인 김 씨에게 주기로 약속한 땅 역시 김 전 장관이 명의이전해 놓은 땅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 전 장관이 설립한 부동산투자회사 AOS 관계자는 “소문만큼 김 전 장관의 재산이 많지 않다”며 “국가로부터 되돌려 받은 재산이 1000억 원대라는 언론보도도 사실과 많이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재산관리는 김 전 장관의 부인이 해왔는데 매우 검소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 부인 역시 치매로 누워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