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억 로또 1등 당첨금의 주인이 수년 만에 사기범으로 전락해 화제다. SBS 뉴스 화면 캡처.
“당첨 번호는 2, 4, 21, 26, 43, 44입니다. 당첨되신 분들 모두 축하드립니다.”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보여주는 일은 평생 없을 줄 알았다. 김 씨는 41세였던 지난 2003년 5월 24일 토요일 저녁을 잊을 수 없다. 무작위로 뽑아 올린 6개 숫자가 하나씩 맞아 들어갔다. 그리고 방송 말미, 로또 추첨 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가 바로 자신을 향해 축하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당첨금은 242억 2700만 원. 24회 차에 1등 당첨자가 없어 당첨금이 누적된 데다가, 당첨금이 오르니 로또를 사는 사람도 많아 상금은 더 늘어났다. 25회 차 당첨금은 484억 원이었다. 1등 당첨자가 두 명이 나와 당첨금은 반으로 쪼개졌지만 그래도 역대 금액순위 2위에 달하는 돈이었다. 참고로 역대 최고 당첨금액은 지난 2003년 4월 19회차 407억 원이었다. 바로 그 유명한 춘천의 경찰관 박 아무개 씨가 사상 최고액의 주인공이다.
김 씨는 원래 별다른 직업 없이 펀드나 주식 등에 투자를 하는 개미 투자자였다. 20년 넘게 투자를 해왔지만 실적은 신통치 않았다. 실적을 낼 때도 있었지만 잃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평생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결혼을 할리도 만무했다. 평생 회사를 다녀본 적 없는 그를 가족들은 안타깝게 보곤 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평생 살았지만 “인생 한 방”이라는 네 글자를 여전히 굳게 믿고 있는 그였다. 언젠가 대박 종목을 택해 수익을 내리라는 기대를 잃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박’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세금을 떼고도 189억 원이라는 거금이 통장에 들어왔다. 여섯 개 숫자에 동그라미가 쳐진 로또 종이를 보며 장밋빛 인생을 꿈꿨다. 거액 당첨자들은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거나 조용히 가족들과 해외로 잠적한다고들 하지만 김 씨는 달랐다. 사정이 어려운 가족들에게 턱턱 돈을 건넸다. “사업에 투자해 달라”고 가족이 부탁하면 수십억 원도 내줬다. 로또에 당첨돼 자신감을 얻게 되자 결혼에도 성공했다.
서울 노원구의 로또명당으로 불리는 복권 판매점. 이곳은 항상 로또를 구매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박은숙 기자
당첨금을 받고 김 씨가 먼저 한 일은 아파트 구입이었다. 웬만한 아파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강남구 서초동에 있는 주상복합 아파트를 택했다. 2003년 당시 시가로 한 채당 22억 원이 넘었다. 아파트 두 채를 사서 40억 원을 지출하고도 통장에는 여전히 100억 원이 넘는 돈이 들어있었다.
가족과 친척들에게 집과 자동차도 사줬다. 집에서 컴퓨터만 쳐다보며 돈 까먹는다고 욕했던 가족들은 이내 김 씨에게 손을 벌리며 찾아오곤 했다. 김 씨는 그중 한 친척에게는 15억 원을 선뜻 내주기도 했다. 매제 이 아무개 씨도 김 씨를 찾아와 “병원 사업을 하는데 돈을 좀 투자해달라”고 사정했다. 김 씨는 서초동에 있는 신축 상가에 클리닉을 마련할 수 있도록 35억 원을 투자했다.
가족들에게 선심을 쓰는 것으로 그쳤다면 김 씨의 ‘쪽박 역전’은 막을 수 있었을까.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줘도 여전히 많은 돈이 수중에 남자 김 씨는 다시 투자를 시작했다. ‘돈이 돈을 부른다’는 말을 믿었던 것이다. 20년 동안 성공해보지 못한 투자가 갑자기 잘될 것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소액 투자를 하고, 등락을 거듭하는 시황판을 보며 초조해 했었다. 이제 통 크게 투자하며 돈을 더 벌어볼 요량이었다. 주식에 또 다시 수십억 원을 투자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5년을 채우지 않고 김 씨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통장에 두기만 해도 월 4000만 원이 쌓이는 돈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가장 타격이 컸던 건 주식이었다.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그간 투자한 수십억 원을 몽땅 잃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상황이 나빠졌던 것. 일순간 수백억 원대 자산가에서 휴지조각만 쥔 실패자로 전락했다. 게다가 매제의 병원에 투자한 35억 원은 서류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아 투자금을 전혀 회수하지 못했다.
김 씨가 체포되기 직전까지 청소 등의 일을 하며 숙식을 해결했던 부동산 중개사무소. 최준필 기자
빚에 쪼들리면서 친척에게 줬던 15억 원이 생각나 소송을 제기했다. 김 씨는 15억 원을 무상으로 증여한 게 아니라 잠시 맡겨놨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맡겨뒀다는 김 씨의 주장을 증빙할 만한 증거가 부족했다. 재판부는 결국 친척의 손을 들어줬다. 설상가상으로 결혼했던 아내마저 등을 돌리고 이혼했다.
김 씨 인생의 내리막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 씨가 사기범으로까지 몰리게 된 건 2010년이었다. 5월경 S채팅사이트에서 만난 정 아무개 씨(여·51)는 “남편 몰래 투자한 돈 5000만 원을 잃었다. 도움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김 씨는 정 씨에게 자신을 투자전문가라고 소개했다. 이런저런 투자 관련 조언을 하며 “선물옵션에 투자해 수익을 내주겠다”고 설득했다. 투자 위험이 큰 분야였기에 정 씨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 씨를 믿고 몇 차례 만남을 통해 수차례에 걸쳐 총 1억 2200만 원을 투자금으로 내줬다.
수개월이 지나도록 수익이 없자 초조해진 정 씨는 김 씨에게 “돈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궁지에 몰린 김 씨는 이미 패소한 15억 원이 걸린 민사소송 소장, 당첨된 로또 종이와 당첨금 입금 영수증 등을 내밀며 “승소하면 15억 원을 받을 수 있다. 소송비용만 대달라”고 다시 정 씨를 속여 설득했다. 김 씨가 가져온 증빙자료를 믿은 정 씨는 또다시 2600만 원을 소송비용 명목으로 내줬다.
나중에서야 김 씨에게 속은 사실을 알게 된 정 씨는 2011년 7월 사기혐의로 김 씨를 고소했다.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던 김 씨는 경찰을 피해 찜질방, 지인의 집 등을 전전하며 숨어 다녔다. 붙잡히기 직전까지 서울 서초구에 있는 부동산 중개사무소에서 운전, 청소 등의 일을 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경찰은 3년여를 추적한 끝에 논현동의 한 부동산에서 김 씨를 붙잡았다.
김 씨는 조사를 받으며 “내 인생 참 기구하다”고 한탄했다고 경찰관계자는 전했다. 또 “지금이라도 돈을 갚을 수 있다. 투자해놓은 곳이 많기 때문에 투자금을 회수해주겠다”라고도 말했다. 사건을 수사한 서울 강동경찰서 경제팀 박찬 수사관은 “지금도 로또 당첨 종이와 영수증을 가방에 고이 넣어 들고 다니더라. 수백억 원을 갖고 있던 경험에 취해 현실감각이 없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지인이 말하는 김씨는… “만원짜리 신발 신던 검소남” 취재를 하며 만난 김 씨의 지인 A 씨는 “김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상당히 검소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쉽게 연상하는 호화생활을 하거나, 허풍이 센 ‘졸부’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A 씨는 “1만 원짜리 운동화를 신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싸게 살 수 있는 곳에 찾아가서 살만큼 돈을 아꼈던 사람이다. 과소비를 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할 사람은 전혀 아니다”고 설명했다. 또 “주변에서도 성실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주식 투자에 관해서 관심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투자권유를 하고 다니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A 씨는 김 씨의 가정사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다. 로또 당첨 후에 만난 김 씨의 아내는 낭비벽이 있었다고 A 씨는 주장했다. 김 씨와 재혼한 아내는 당첨금으로 돈을 쓰고 다녔고, 주변 사람들이 평생 큰돈을 만져본 적이 없는 성실한 김 씨를 속여 돈을 탕진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수개월을 알고 지냈지만 로또 1등을 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얘기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김 씨가 투자한 매제의 병원에 대해서도 “서초동에 있는 상가 사무실 두 개를 분양 받아서 도와준 걸로 알고 있다. 병원도 나중에 잘돼서 압구정으로 옮겨갔더라. 자기 도와준 사람한테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등을 돌릴 수 있느냐”며 안타까워했다. 또한 A 씨는 “투자금을 건넸다가 김 씨를 사기혐의로 고소한 정 씨도 선물옵션에 투자할 것을 알고 있었지 않았느냐. 초반에 김 씨가 ‘손해가 나고 있다’고 얘기까지 한 걸로 알고 있다. 그래도 계속 투자하라고 돈을 준 건 정 씨인데 어떻게 그게 사기죄가 성립하느냐”고 되물었다. 또 3년여를 정 씨와 경찰을 피해 도피생활을 했다는 보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A 씨는 “1년 전에 ‘투자금을 꼭 돌려주겠다’며 정 씨에게 전화까지 했는데 도피는 무슨 도피냐”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는 김 씨의 생각일 뿐 투자금을 돌려받으려는 입장에선 1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A 씨에 의하면 김 씨가 투자하며 도와줬던 일가친척들도 김 씨가 사기 혐의를 받게 되자 등을 돌렸다고 한다. “정이 많아 이렇게 된 것 같다. 참 인복도 없는 사람”이라며 혀를 찼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