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당판사와 피고인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판사의 양형을 법제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다. | ||
지난해 양형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의 설문조사 결과도 이런 문제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당시 설문에 응한 1000명의 시민들 가운데 무려 73.9%가 “법원 판결에 일관성이 없다”고 답했으며 학력이 높고 소득이 많을수록 법원의 양형 일관성에 대한 불신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법조 전문가들도 응답자 2294명 가운데 63.3%가 “법원 판결에 일관성이 없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법원의 양형기준안 마련을 계기로 대표적인 ‘고무줄 양형’의 사례를 살펴봤다.
우선 선거사범이나 경제사범에 대해서는 법원이 일반사건보다 낮은 형량을 선고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어왔다.
1994년 민주노총 준비위원장 당시 불법 집회를 주도하고, 구 노동쟁의조정법상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위반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은 1심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국회의원으로 성실히 일한 점’ 등이 참작돼 벌금 1500만 원이 선고돼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정치자금법 위반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월의 선고유예를 받았던 대통합민주신당 문석호 전 의원은 항소심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문 전 의원은 2005년 12월 에스오일 김선동 회장에게 100만 원, 김 회장의 지시를 받은 에스오일 직원 546명으로부터 일인당 10만 원씩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8월의 선고유예와 5560만 원의 벌금을 선고받은 바 있다. 그러나 2007년 8월 대전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정치자금법상 금지된 공무원의 사무에 관한 청탁 또는 알선과 관련한 기부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2002년 5월부터 2003년 7월까지 이천과 김포의 병원 부대시설 임대료 명목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17억여 원을 받아 가로채고 2003년 6월 한 리츠업체 사장으로부터 청와대 청탁을 명목으로 1억 15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돈 민경찬씨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는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병원 임대료를 가로챈 것은 치밀한 계획하에 이뤄진 것이 아니며, 실제로 청와대 청탁이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양형 이유였다.
또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150억 원 차떼기 사건에 연루된 한나라당 최돈웅 전 의원은 1심에서 2년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는 1년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이상의 사례는 1심과 2심의 양형이 큰 차이를 보인 경우이고 반대로 1심에서 무죄였던 것이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경우도 없지 않다.
지난해 대선 당시 인터넷에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 반대하는 댓글을 단 혐의로 기소된 A 씨에 대해 지난 5월 25일 항소심을 맡았던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는 1심의 무죄 판결을 뒤집고 벌금 50만 원을 선고했다. 또 같은 법원 형사6부도 인터넷 카페에 당시 이명박 후보 및 한나라당을 비난하는 글을 30여 차례 남긴 혐의로 기소된 B 씨에 대해 무죄 판결의 원심을 깨고 벌금 80만 원을 선고했다.
▲ 서초동 대법원 청사. | ||
배임·횡령 등으로 최근 형이 확정된 15개 대기업 사주들에 대해 1심 재판부는 9건에 대해 실형을, 5건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했지만 항소심에서는 모두 집행유예가 떨어졌다.
1161억 원의 비자금 조성과 세금포탈 혐의로 99년 11월 구속된 조양호 전 대한항공 회장은 1심에서 징역 4년을 받았지만 ‘항공산업 발전을 위해 성실히 일한 점’이 감안돼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1조 9000억 원대의 분식회계를 지시한 혐의로 2003년 구속된 최태원 SK 회장은 1심에서 징역 3년을 받았으나 2심에서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2004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불구속,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김승연 한화 회장은 2심에서 벌금 3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300억 원대 비자금을 만들어 개인용도로 사용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두산그룹 박용성 전 회장은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았다.
분식회계를 통한 대출 사기와 횡령 혐의로 기소된 성원그룹 전윤수 회장도 2006년 초까지 이어진 1심과 2심에서 모두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비슷한 혐의로 기소된 쌍용그룹 임원진을 비롯해 현대전자, 한신공영, 성원토건 임원진과 두산그룹 총수 일가에도 집행유예와 벌금형이 선고됐다.
석연찮은 온정적 판결은 사회지도층인사의 성범죄 경우도 마찬가지다.
장애 학생들을 성폭행하거나 성추행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던 광주 OO학교 전 교장과 교사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성폭행 죄 등으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던 전 교장 김 아무개 씨(62)에게 항소심 재판부는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강제 추행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던 이 학교의 전 생활재활교사 박 아무개 씨에 대해서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죄질이 나쁘지만 전과가 없고 피해자와 합의한 점을 참작할 때 원심의 형은 모두 무겁다”는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이 같은 온정주의에 대해 일각에서는 일반인보다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직업을 고려한다면 거꾸로 더 엄격한 법적용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사회지도층인사의 성범죄와는 사뭇 다른 선고가 내려진 사례가 적지 않다.
사실 양형판결 논란은 법관의 재량권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다. 이와 관련, 노회찬 의원은 “어느 법관이 재판하더라도 비슷한 범죄에 비슷한 양형이 나오도록 법제화돼 있지 않은 것이 근본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번에 열린 양형 공청회는 법원 측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연상케하는 일부 편향된 판결을 어느 정도는 인정한 결과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정치인 기업인들에 대한 일부 법관의 편향된 판결을 법원 전체의 성향인 양 비난해서는 안된다”며 “이번 양형기준안 마련은 법관의 양형 재량권을 인정하되 재량권 남용을 견제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