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A 씨(30대)는 충남에 위치한 모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레지던트에 최종합격했다. 젊고 전도유망했던 ‘예비 전문의’ A 씨는 2010년 지인의 소개로 B 씨(여·30대)를 만났고 같은 해 11월 결혼까지 했다.
상당한 재력을 지닌 부인 B 씨의 부모는 소위 ‘사’자 사위인 A 씨에게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A 씨는 군복무도 마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B 씨의 부모는 딸과의 결혼을 흔쾌히 허락했다. B 씨의 부모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A 씨 집안 대신 이들의 신혼집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레지던트 1년차에 불과했던 A 씨가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고,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B 씨 부모 덕분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결혼 후에도 시부모를 부양해야하는 남편 A 씨의 사정을 헤아려 부인 B 씨의 부모는 사돈의 생활비까지 지원했다. A 씨는 처가의 전폭적인 후원 덕분에 대학원 졸업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A 씨와 B 씨는 시댁을 부양하는 문제로 자주 부딪치고는 했다. 급기야는 부인 B 씨의 성형 문제를 두고도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던 이듬해 7월, 부인 B 씨는 남편이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당시 27세)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남편 A 씨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부인 B 씨는 하루아침에 무서운 복수의 화신으로 돌아서게 된다.
배신감에 휩싸인 B 씨는 “27살 난 여자랑 바람을 피웠으니 자해 뒤 27바늘을 꿰매면 용서해 주겠다”는 황당한 요구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남편 A 씨가 아내의 말대로 병원 조교수에게 부탁해 왼쪽 팔뚝에 7cm가량의 상처를 내고 27바늘을 꿰맨 것이다. 그러나 남편의 행동은 오히려 부인을 더욱 화나게 했다. 부인은 급기야 남편의 성기를 발로 차고 망치로 27차례 때리는 등 전치 3주의 상해를 가했다.
부인 B 씨의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B 씨는 남편 A 씨에게 경제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B 씨는 남편에게 내연녀에 대한 소송비용과 친정으로부터 받은 고급 외제차 가격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A 씨는 3회에 걸쳐 B 씨에게 8500만 원을 건네기도 했다.
결국 결혼 1년 10개월만인 2012년 9월, 두 사람은 이혼하기로 결심하고 갈라섰다. 부인 B 씨는 결혼생활을 끝내면서 남편 A 씨와 위자료 액수를 합의하는 서류를 작성했다.
부인 B 씨의 친정으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던 A 씨에게 돌아온 ‘이혼 청구서’는 상당한 대가를 요구했다. 두 사람이 작성한 합의서에 따르면 ‘△남편 A 씨는 합의서 작성 이후부터 군대에 입대할 때까지 매월 600만 원 △군의관으로 입대하는 경우 제대할 때까지 매월 10만 원 혹은 공중 보건의로 재직하는 경우 매월 300만 원 △제대 후 전문의 15년차가 될 때까지는 매월 700만 원을 지급한다’고 되어있다. 장래 지급하기로 약속한 위자료까지 포함하면 13억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현재 공중 보건의로 근무 중인 남편 A 씨는 지난해 3월까지 약속대로 B 씨에게 돈을 지급했다. 하지만 지난해 4월부터 남편 A 씨가 더 이상 위자료를 지급하지 못하겠다며 돈을 주지 않고 버티기 시작했다. 이에 부인 B 씨는 지난해 8월 “합의에 따른 위자료 13억 1890만 원을 모두 일시금으로 지급할 의무가 있다”며 약정금 소송을 냈다. 이에 남편 A 씨는 “이 합의는 사회질서에 반하거나 불공정한 법률행위에 해당하니 무효이고, 또는 합의는 피고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이므로 합의에 따른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지난 23일 서울중앙지법 제16민사부(재판장 이정호 부장판사)는 “피고는 원고에게 1억 6231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남편이 지급해야할 위자료를 8분의 1 수준으로 대폭 삭감한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는 외도를 해 혼인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한 유책배우자로서 원고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면서도 “이 사건 합의에서 정한 위자료는 피고의 잘못을 고려하더라도 손해배상책임이 과도하게 무겁고,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법률행위라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남편에게 외도라는 1차 책임이 있지만 부인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응했다는 사실도 법원이 위자료를 대폭 삭감한 이유였다. 부인이 ‘용서를 받고 싶으면 내연녀의 나이만큼 자해를 하고 꿰매라’는 요구를 하거나, 망치 등으로 남편의 성기를 때리는 것 등이 사회통념상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는 합의 당시 원고로부터 자해 요구를 받았고, 성기 부분을 폭행당하는 등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기 어려운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며 “피고가 향후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수입, 통상적으로 이혼소송을 통해 유책배우자가 상대방 배우자에게 부담하게 되는 위자료 액수, 원고와 피고 사이의 혼인기간 등을 고려하면 피고가 원고의 혼인 여부와 무관하게 합의에 따른 위자료 13억 1890만 원과 2017년 5월(남편이 전문의가 되는 시점)부터 15년 동안 매월 700만 원을 지급하도록 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도하다”고 판시했다.
이번 판결과 관련 부인 B 씨 측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처음 합의를 하던 당시 위자료가 과하게 책정된 감은 있다. 하지만 부인 B 씨도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판결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항소까지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27차례 망치로 때렸다거나 하는 것도 A 씨 측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부인은 남편이 자해한 것이라고 보는데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남편 A 씨 측 변호인은 “그 사건과 관련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