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8일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가 이익치 전 현대증 권 회장의 발언과 관련, 당직자들과 함께 해명 기자회견 을 갖고 있다. | ||
익명을 요구한 이 관계자는 “현대가 가신들은 DJ정부와 현대그룹, 정치권과 현대그룹 간에 난마처럼 얽힌 역학관계를 잘 알고 있다”면서 “이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 정치권이 핵폭탄에 가까운 충격을 받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대선정국이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대그룹 가신들의 발언은 내용에 따라 현재 대선구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 등 세 후보의 이해관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현재 이같은 비밀을 알고 있는 가신들로는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을 비롯해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 김재수 전 현대건설 부사장, 최용묵 현대엘리베이터 부사장, 강명구 현대택배 부회장, 이영기 전 현대중공업 부사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현대그룹에서 자금을 담당했던 핵심인물이라는 것. 때문에 이들은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의 실체, 현대상선 비자금 4천억원의 행방,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폭탄발언 배후, 현대전자 빅딜의 진실, 하이닉스 반도체와 정치권 연루의혹 등을 소상히 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가 전격 합의됨으로써 대선구도가 급변하고 있는 가운데 이익치 전 회장이 지난 16일 전격 귀국했고, 이에 앞서 김충식 전 사장도 미국 현지에서 현대상선 4천억원과 관련해 ‘이상한 뭉칫돈’을 주장하고 나서 정치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른바 ‘현풍(現風)’이 대선정국에 미칠 정치적 파장을 집중 분석했다.
▲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과 정몽준 후보
노무현-정몽준 대선후보 단일화합의가 전격 이뤄졌던 16일 새벽, 정 후보에게 정치적으로 큰 부담으로 작용할 인물이 귀국했다. 지난달 말 일본 도쿄에서 갑작스레 기자회견을 갖고 정 후보의 현대전자 주가조작 연루 의혹을 제기했던 이익치 전 회장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돌연 입국한 것.
그는 아들 병역문제와 관련해 금품제공 혐의로 검찰의 지명수배를 받아왔다. 이 전 회장은 검찰에서 “나의 억울함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귀국했다”면서 “조만간 기자회견을 열어 (주가조작과 관련된)자료와 다른 의혹을 밝히겠다”고 주장했다.
단일후보 선정을 위한 여론조사를 앞두고 있는 정 후보로서는 뜻밖의 돌출상황이 발생한 셈이다. 사실 지난달 말 이 전 회장의 ‘도쿄발언’ 이후 정 후보의 지지도는 뚜렷한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달 말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 후보의 지지도는 20% 중반대로 떨어졌다.
노 후보와 격차도 5%안팎으로 줄어들었다. 이 같은 현상을 놓고 정치권에서는 이 전 회장의 발언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번 이 전 회장의 귀국이 이번주에 판가름날 노-정 후보단일화 선정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더군다나 단일화 합의 이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 후보는 3위로 밀려났다. 단일화 선호도 조사에서도 노 후보에게 뒤지는 것으로 나타나 정 후보로서는 불길한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이익치씨가 정 후보의 발목을 잡고 결국 노 후보의 손을 들어주는 형국이 될 것”으로 분석했다.
▲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폭탄발언과 이회창 후보
이익치 전 회장이 노-정 후보단일화가 전격 합의된 날짜에 맞춰 귀국한 배경을 놓고 정치권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정 후보측은 “후보단일화가 타결되자마자 이익치씨가 귀국한 그 배후가 의심스럽다”며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는 특정후보 낙선을 위한 공작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민주당도 정 후보측을 지원사격했다. 이낙연 대변인은 “이익치씨는 이회창 후보의 고등학교 후배로서 지난 97년 대선 당시 이 후보에게 30억원의 선거자금을 건넨 장본인”이라며 배후설을 제기했다.
▲ 왼쪽부터 이익치 전 회장, 김충식 전 사장, 김재수 전 부사장 | ||
그는 또 “내 눈에는 정 후보가 많이 참고 있다는 게 보인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실 이 전 회장의 행동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는 99년9월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으로 1심서 징역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후 그는 2000년 5월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다시 현대증권 회장으로 전격 복귀했지만 같은 해 8월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과의 갈등설로 일선에서 물러난 뒤 현대와 완전히 결별하고 이제까지 미국에 머물러 왔었다.
‘외톨이’ 신세였던 그가 갑자기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27일 정 후보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 도쿄발언이 계기였다. 그런데 체류중인 미국에서가 아니라 일본에서 기자회견을 한 것이 의심을 받고 있는 대목.
때마침 한나라당은 이씨의 기자회견이 있기 전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의 공소장을 입수, 자체 분석하고 있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이상했다. 때문에 정 후보측은 한나라당을 배후세력으로 지목했다. 일각에서는 이 전 회장과 이 후보 측근의 사전 접촉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물론 양측은 이를 극구 부인하고 있다. 특히 이 전 회장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앞으로 20년 동안 뭘 하는지 지켜봐 달라”며 정치권 연루 의혹을 일축하고 있다.
▲ 현대상선 비자금 4천억원의 행방과 노무현 후보
김충식 전 회장은 현대상선 4천억원 대출사건과 관련해 “정몽헌 회장이 그룹의 생존 차원에서 필요하다며 현대상선에 ‘이상한 뭉칫돈’을 요구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 돈이 북한으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김 전 회장은 현재 신병치료차 미국 현지에 머물고 있다. 그는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가 지난 9월말 국회 국정감사에서 현대상선 4천억원에 대해 “(김충식 회장이)정부가 갚아야 할 돈이라고 말했다”고 발언하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나라당은 즉각 DJ정부와 정 후보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김문수 기획위원장은 “대출받은 4억달러가 회사 경영 용도가 아닌 정치적 용도로 사용된 게 당시 사장의 증언으로 확인됐다”면서 대북 뒷거래 의혹을 재점화시켰다. 한나라당은 이와 함께 철저한 계좌추적을 다시 요구하고 나섰다.
물론 정부는 계좌추적에 대해 ‘불가’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김 전 회장은 현재 “나는 현대에 빚진 게 없다. 나도 마음만 고쳐 먹으면 폭로할 게 많다. 계속 건드리면 가만 안 있겠다”고 경고 메시지를 던져 놓은 상태다.
정치권에서는 현대상선 대출금 4천억원이 현 정부와 어떤 형식으로든 관련돼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만일 이와 관련 구체적 물증이 나올 경우 현 정부와 정 후보는 물론 노 후보까지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노 후보가 ‘탈DJ’행보를 하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해 혹시 튈지 모를 불똥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라는 시각도 없지 않다.
▲현대 가신들,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익치씨의 도쿄발언 이후 한달째 종적을 감추고 있는 이영기 전 현대중공업 부사장. 그는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현재 가족들과 함께 지방 모처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중공업에서 4년간 부사장으로 근무하면서 자금을 담당해 주가조작 사건은 물론 현대중공업 전체 자금의 이동경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게 현대그룹에 정통한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최용묵 현대엘리베이터 부사장도 현대상선의 비자금과 관련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게 김충식 전 사장의 전언이다.
김 전 사장은 “그는 지난해 내가 사표를 내자마자 ‘왜 비자금을 인수인계하지 않느냐’며 소리를 쳤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최 부사장은 비자금에 대해 부인하고 있으나 그가 현대그룹과 정치권의 자금 흐름을 대략 알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 현대 가신 출신들이 입을 열 경우 한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구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으로 정치권은 내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