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특정인이 뿌린 돈과 관련해 유례없이 많은 정치인들이 얽힌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권에 몸 담고 있는 관계자들은 박 회장의 ‘통 큰 스타일’과 관련 있다고 보고 있다. 돈을 잘 쓰면서 의리 있는 사람으로 통했던 박 회장 주변에 자연스럽게 유력 인사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박 회장의 돈이 수십 명의 정치권 인사들의 발목을 잡게 된 정치권 뒷얘기를 취재했다.
박연차 회장의 주변에는 항상 정치인과 고위 검찰 간부 등 지역 유력인사들이 많았다.
성격이 워낙 호탕한 데다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좀처럼 먼저 연을 끊지 않는 이른바 ‘의리남’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박 회장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폭넓은 정치권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입소문’이 한몫했다고 말하는 이도 적지 않다.
박연차 리스트에 많은 정치인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실제 박 회장이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며 정치인들에게 후원금을 대줬기 때문이다. 물론 박 회장이 후원금을 주며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음은 박 회장을 잘 아는 한 정치권 관계자의 말이다.
“박 회장이 정치인들을 만날 때면 금액별로 봉투를 세 개 정도 준비했다고 한다. 헤어질 때 이 봉투 중 하나를 건넸는데 정치인들의 됨됨이를 보고 액수를 달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신기한 것은 돈을 주면서 어떠한 부탁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월이 흘러도, 돈을 받은 정치인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돈을 핑계로 부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박 회장 입장에서야 일종의 보험을 든 것이었는지 몰라도 정치인의 입장에선 그가 주는 돈은 부담이 덜했던 것이다. 이것이 박 회장 주변에 정치인들이 많이 몰린 이유라 할 수 있다. 현재 리스트에 거명되는 정치인들도 한 번쯤은 이런 식으로 용돈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박 회장의 ‘호기’는 윤윤수 전 휠라 코리아 회장과 일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윤 전 회장은 지난 2003년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자신과 박 회장 사이에서 있었던 재미난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기고문에 따르면 윤 전 회장은 1980년대 중반 사업을 막 시작했을 무렵 태광실업에 근무하는 후배에게서 “우리 사장님이 한 번 뵙자고 하는데요”라는 전화를 받았다. 박 회장과 윤 전 회장 두 사람은 1945년생 동갑내기이고 같은 신발업체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일면식도 없었다. 부산의 한 일식집에서 만난 박 회장은 윤 전 회장에게 “재주가 많은 분인데, 자금이 부족해 곤란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돈이니까 오해 마시고 사업에 보태 쓰십시오”라며 봉투를 내밀었다는 것.
직원들 월급을 못 줄 정도로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고 있던 윤 전 회장은 염치 불구하고 봉투를 받았고, 나중에 뜯어보니 봉투 안에서는 5000만 원짜리 당좌수표가 나왔다고 한다. 윤 전 회장은 “당시 5000만 원이면 요새로 치면 10억 원 정도의 거금이었다. ‘이 양반 정신이 돈 게 아닌가’ 해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고 기고문에서 당시의 심경을 밝혔다. 윤 전 회장은 이 돈으로 부도위기를 탈출했고, 훗날 박 회장에게 갚아주려고 했지만 박 회장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정치권 인사도 “(박 회장은) 우연히 식사 자리에서 마주친 정치인에게도 ‘그냥 쓰시라’며 수백만~수천만 원을 턱턱 던져준 것으로 들었다”고 전했다. 이 정치권 인사는 “검찰이나 경찰 간부들이 부산지역으로 발령이 나면 으레 박 회장과 인사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귀띔했다. 검찰, 경찰 등 수사기관 관계자들도 정치권 인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실제 지난 인사 때 지검장 인사 4명이 박 회장과 연루됐다는 소문 때문에 좌천된 적이 있는데 이들은 곧바로 검사직을 그만뒀다.
이렇게 해서 언급되는 인물이 최대 100명가량이라는 게 현재 검찰청사 주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박 회장이 너무 부담스러운(?) 거물들의 이름을 거론해 오히려 검찰이 부담스러워한다는 시각도 있다. 특히 현직 고검장급 인사가 거론되면서 검찰 수뇌부가 상당히 고민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현재 검찰에서는 리스트에 검찰 수뇌부가 있다는 말에 대해 극구 부인하고 있다. 모 일간지가 보도한 현직 고검장급 인사 거액 수수설에 대해서도 검찰은 “사실과 다르다”며 부인했다.
박 회장과 검찰 사이에서 일종의 플리바게닝(검찰이 수사편의상 피의자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거나 증언을 하는 대가로 형량을 조정하는 협상제도)이 있었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유력인사들을 제외한 채 야권 핵심인물 몇몇과 여권 정치인 몇몇을 조사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할 것이라는 게 바로 그것. 그러면서 이정욱 전 원장, 송은복 전 시장 등의 이름이 박 회장의 입에서 나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미 정치권에서 이름이 파다하게 퍼져있는 이들에 대한 수사가 미진하다면 야권의 반발이 거셀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더욱이 여권에선 흘러간 인사만 수사를 하고 야권에선 핵심들이 다치는 상황이 된다면 야권에서 폭로전을 전개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향후 수사결과에 따라 박 회장의 추가폭로 가능성도 없지 않다. 민주당 측에서는 “검찰이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어떤 목적을 갖고 유출했다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공식 수사를 하지 않은 상황인데 대응할 필요도 없지 않으냐”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 수사에 대한 청와대의 입장도 주목된다. 전 정권에 대한 현 정권의 사정수사는 이미 지난해부터 계속돼왔다. 청와대가 주목하는 부분은 노무현 대통령의 후원자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과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다. 하지만 강 회장과 관련된 부분들은 불법으로 몰고 가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박연차 리스트에 대해 사정드라이브를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론 현 여권 실세들의 이름도 오르내리고 있지만 현재 청와대 일각에서는 “여권 정치인 몇 명이 희생되더라도 수사를 계속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이번 사정수사는 향후 전 정권 386 실세들까지 이어져야 종결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