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정체성 논란’과 관련, 딜레마에 빠져 있다. 사진은 당 상임위원회에 참석한 박 대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른바 ‘국가 정체성 논쟁’을 계속해야 할지 이쯤해서 그쳐야 할지를 놓고 판단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덫이다. 계속 ‘고’하자니 예상 외의 수세국면이 반전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이고, ‘스톱’하자니 여권에 이니셔티브를 빼앗길 것 같아 여간 곤혹스럽지 않은 것 같다.
정체성 논란은 특히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평가 중 ‘과거사’ 문제와 연관이 있다. 이는 아버지의 후광을 토대로 성장해온 정치인 박근혜가 신경쓰는 사안이다. 정체성 논쟁이 이미 과거사 논란으로 변질됐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거듭 고민중이다. “(여권이 과거사에 대한 통합적인 정리작업에 나선다는 것은) 간첩이 또 민주인사가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되고 간첩이 군 장성을 오라가라 하면서 취조를 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우리 국경을 침범해도 아무런 소리를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정부의 국가관이나 체제수호의 입장이 이렇다면 우리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본다.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 바늘 허리에 실을 감아서 쓸 수 없다. 암에 걸려 아스피린 먹인다면 병이 깊어지지 치료가 되겠나. 나라의 깊은 병이 언제까지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정치권이 이 문제를 짚지 않고 대충 넘어가면 역사의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2일 당 상임운영위원회 모두발언)
박 대표가 국가 정체성 논란의 2라운드를 선언하고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박 대표의 진심일까. 박 대표는 과연 정체성 논란을 끝까지 끌고 나갈 각오와 자신을 갖고 있는가.
박 대표가 자신의 심경을 밝힌 또 하나의 글. “… 삶이 너무 무거워 지칠지라도 우리는 견뎌내 미래를 보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미래에 남겨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우리를 스스로 성숙시키기 위해서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면 많은 사람은 그 길을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구나 살면서 어떤 어려움도 없이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 요즈음 더위만큼이나 저도 어렵고 힘든 나날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여러분이 옆에 계셔서 견뎌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 조금만 더 힘든 길을 이겨내시길 바라면서 … 제 사랑의 마음이 늘 여러분과 함께 걱정하고 삶을 같이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박 대표는 지난달 31일 자신의 홈피(www.cyworld.com/ghism)를 통해 여권의 ‘아버지 전력’ 등 정체성 논란에 대한 공격에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 지난 7월22일 박근혜 대표가 전여옥 심재철 의원과 함께 가수 이승철 콘서트를 관람하며 밝게 웃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
박 대표의 ‘전면전’ 발언은 당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나라당의 주요 관계자들은 대부분 정체성 논란이 유신체제 하의 인권문제 등 과거사 문제를 불러오고 이는 다시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순환구조를 예견했던 듯하다.
한나라당의 권력구조를 양분하는 ‘주류’ 중에서도 국가 정체성 논란과 전면전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이는 이한구 정책위의장 정도다.
비주류들은 대부분 팔짱을 끼고 있다. 이재오 김문수 의원 등 수도권 출신의 반(反)박근혜 3선들은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의 인권탄압 문제를 떠올리기도 한다. 나아가 박 대표의 측근 브레인인 박세일 여의도연구소장은 “박 대표가 적절한 시점에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권탄압)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하는 등 박 대표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했다.
상임운영위 등 한나라당 각종 회의 석상에서 비공식적으로 당직자들과 참석자들의 자제 건의가 잇따르는 형국이다.
이달 초 열린우리당 원혜영 의원 등이 의문사위의 권한과 조사대상을 대폭 강화한 개정안을 추진하기도 전에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이 의문사법개정안을 발의했었다. 이 법은 원혜영 의원안과 다소 차이가 있을 뿐 큰 틀에서는 일치한다. 최근 일군의 당직자들이 박 대표에게 “정체성 논란에서 한발 물러나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으나, 박 대표는 “당에서 그동안 나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느냐”며 섭섭함을 토로했다는 말도 들린다.
휴가를 마친 박 대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박 대표가 2일 상임운영위원회에서 국가 정체성 논란에 대한 재점화를 시도한 후에도 회의장 분위기는 썰렁했다. 그가 이날 태릉선수촌 현장방문을 위해 회의장을 일찍 떠난 후엔 남경필 김영선 등 소장개혁파 의원들이 나서 “정체성 논란에서 지도부는 나서지 마라”며 오히려 전체적 분위기의 톤 다운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 진상 규명이나 의문사위 활동의 칼 끝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표 부녀를 향해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치부는 곧 박근혜 대표의 상처로 이어질 게 확실하다. 이것이 박 대표가 갖는 정치적 부담이다.
박 대표는 애당초 국가 정체성 논란이 과거사 논란으로 연결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자신이 이념적으로 자유민주주의에 충일하고 애국심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정체성 논쟁인데, 과거사 논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권탄압 문제를 파헤치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권이 파고든 건 바로 이 지점이다.
당내에서조차 과거사 논란과 관련해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많다는 평가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박 대표가 이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극복할지에 대해 남은 답은 이제 하나뿐이다. 박 대표의 한 최측근은 이와 관련, “박 대표는 과거사 문제는 자신이 져야할 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국가 정체성 문제는 물러서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확고하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박 대표는 앞으로 과거사 논란과 정체성 논쟁, 양자의 분리투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이 최측근 인사는 “과거사 논란은 최대한 억제하되, 국가 정체성 논란은 사안 하나하나를 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식의, ‘현안 중심의 개별적 이념투쟁’을 벌여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