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대검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날 노란 물결을 이룬 노사모 회원과 보수단체 회원 사이에 충돌이 빚어졌다. 사진공동취재단 | ||
4월 29일 오전 10시 30분 서초동 대검찰청. 전직 대통령이 소환조사를 받는 역사적인 순간을 3시간여 앞두고 청사 정문 우측으로 ‘반핵반김국민연합’ 회원 등 200여 명의 보수단체 회원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이 60~70대 노인들로 보이는 이들은 ‘국민은 검찰을 믿는다, 노무현 즉각 구속하라’ ‘500만 달러는 빙산의 일각 부정부패 척결’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집회를 준비했다. 몇 분 뒤 회원들은 같은 내용이 적힌 피켓을 들고 ‘노무현 구속’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점심식사도 거른 채 4시간가량을 그렇게 외쳤다. 60~70대의 노인들로 보이지 않을 만큼 에너지가 넘쳤다.11시가 지나자 노사모 회원들도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란 재킷, 노란 목도리, 노란 장미 등 저마다 노사모 회원임을 알리는 다양한 코디를 하고 등장했다. 이들은 청사 정문 좌편과 도로 넘어 맞은 편 가로수에 노란 풍선과 검찰 수사를 규탄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하나 둘 모여들던 노사모 회원들은 어느새 450여 명이나 됐다.
노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무리와 그를 구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 단체 사이에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보수단체 회원들이 ‘노무현 구속’을 외치면, 노사모 회원들은 여기에 맞춰 ‘이명박 구속’을 외쳤다. 노사모 회원들의 수가 많았고 비교적 회원들의 나이가 젊었던 탓에 ‘이명박 구속’을 외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여기에 질 수 없다는 듯 보수단체 회원들은 확성기에 대고 더 크게 ‘노무현 구속, 노사모 해체’ 소리를 질렀다.
▲ 사진공동취재단 | ||
보수단체에게는 열정은 있었으나 전략은 다소 부족해 보였다. 일찌감치 청사 우측 편에 자리 잡은 보수단체는 경찰 병력에 둘러싸여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보수단체와 경찰 병력 밖 도로 편에 위치한 노사모 회원들이 훨씬 눈에 잘 들어왔다. 뒤늦게 노사모 옆에 자리 잡은 보수단체도 확성기를 통해 기자회견을 하려 했으나 누군가(?)의 방해로 정상적인 진행이 불가능했다.
확성기와 피켓시위를 통해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이던 보수세력에 비해 노사모는 비교적 느슨한 분위기를 보였다. 이것은 작전이었을까. 노 전 대통령이 탄 차량이 검찰청사에 다다르고 검찰청 문이 열리는 순간 노사모 회원들은 일순간 도로로 뛰쳐나가 ‘노무현 파이팅’을 외치면서 노란 풍선을 흔들어댔다. 불과 1분도 안 된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몇 분 전의 느슨함은 간데없을 만큼 조직적이었고 재빨랐다.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은 신발과 계란을 버스에 투척했으나 명중률은 현저히 떨어졌다. 거리가 너무 멀었던 것이다.
‘대결’은 청사 정문 앞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검찰청 앞에 있는 한 식당 종업원들 사이에서도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노사모 회원들이 내건 현수막에 있는 노 전 대통령의 사진을 본 한 종업원이 ‘불쌍하다’고 말하자 옆에 있던 다른 종업원이 손님들도 다 들리게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라고 쏴붙였다. 식당 분위기는 일순 ‘싸’해졌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 임영무 기자(왼쪽),임준선 기자(오른쪽) | ||
그때 찻집에 있는 TV를 통해 노 전 대통령 소환과 관련한 각종 뉴스 특보가 흘러나왔다. 뉴스를 접한 양측의 반응은 엇갈렸다. 남성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당장 구속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여성들은 ‘정권의 보복수사’라며 현 대통령을 비난했다. 서로에게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바로 옆 테이블에 있었던 탓에 서로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곧바로 고성과 거친 말이 오갔다. 남녀 사이였으니 망정이지 상대들도 남자들이었다면 대판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수단체 회원들의 체력은 노사모를 따라가지 못했다. 밤이 되자 보수단체 회원들은 물러갔지만 노사모 회원들은 계속 자리를 지키면서 노 전 대통령이 조사를 마치고 귀가한 새벽 1시경까지 촛불집회를 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검 청사에 도착하기 전 한 방송사 기자가 검찰조사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을 물었다. 한 시민이 “안타깝죠.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되겠죠”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노사모 회원이 불쑥 한마디했다. “4년 후에도 똑같을텐데 뭘….”
이 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환 현장은 갈라진 한국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슬픈 자화상이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