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외교 3인방(박영준 전 차관, 이상득 전 의원, 이명박 전 대통령) 등 비리 국정조사 및 청문회 실시 여부를 놓고 친박-친이가 물밑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임준선·최준필 기자
이명박 정부 시절 ‘왕차관’으로 불린 박영준 전 차관이 11월 13일 서울 천왕동 남부교도소에서 2년 6개월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했다. 그러나 박 전 차관의 앞날은 더욱 험난할 전망이다. 야권이 공세를 퍼붓고 있는 사자방 비리의 한 축, 자원외교를 이끌었던 장본인인 까닭에서다. 박 전 차관은 자원외교 관련 자신의 입장 표명을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에게 “지금 재판 중이니 양해해 달라”고 답한 뒤 자리를 떠났다.
박 전 차관이 출소함에 따라 사자방 국정조사를 둘러싼 여야 공방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박 전 차관, 이상득 전 의원, 이명박 전 대통령을 ‘자원외교 3인방’으로 정하고 집중 공격한다는 전략이다. 우윤근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는 11월 11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이명박 전 대통령도 청문회의 증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새정치연합이 사자방 국정조사 관철에 공을 들이는 것을 놓고 정치권에선 여러 해석을 내놓고 있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새정치연합이 주로 전 정권 비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현 정부로까지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여권이 선점한 공무원연금 개혁, 개헌론과 같은 굵직굵직한 이슈에 맞설 만한 아이템으로도 이해된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새정치연합이 사자방을 통해 친박과 친이 간 분열을 노리고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은 부정적 기류가 확연하다. 김무성 대표는 우윤근 원내대표의 ‘MB(이명박) 청문회 대상 가능성’ 발언에 “절대 받을 수 없다”고 일축하기도 했다. ‘4대강 전도사’로 불렸던 친이계 중진 이재오 의원도 “정치공세로 가면 안 된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친박 의원들 중에서도 “새정치연합이 예산국회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최경환 부총리와 연관이 있는 자원외교를 문제 삼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새누리당은 새정치연합 요구를 정치공세로 규정하는 한편, 민생법안 처리가 시급하다는 측면을 부각시켜 방어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여권의 핵심인 친박계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들린다. 버티기만 하다가는 자칫 박 대통령 국정 운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정치권 요구를 무조건 묵살하기는 힘들지 않겠느냐. 사자방을 떠나 비리는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는 게 박 대통령 생각”이라면서 “여야가 (국정조사) 합의만 한다면 청와대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귀띔했다.
‘빅딜설’이 고개를 드는 배경이다. 즉, 사자방 국정조사 요구를 받는 대신 청와대가 사활을 걸고 있는 공무원연금 개혁안 등 중요한 법안 처리를 얻어내자는 것이다. 친이계가 사자방 국정조사에 반대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빅딜설 진원지는 친박 내부일 가능성이 높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친박계로선 사자방 국조가 껄끄럽긴 하지만 반대급부만 충분하다면 내줄 수 있는 사안이다. 다만, 친이계와의 갈등은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친박의 이러한 움직임에 친이계는 불쾌감을 내비치면서도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지난 11월 12일 이 전 대통령은 경기도 하남시의 한 식당에서 수석비서관 출신 등 최측근 10여 명과 만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이 전 대통령 측은 “정기 모임이었을 뿐”이라며 정치적 해석에 대해 선을 그었지만 사자방 비리와 관련된 논의도 오간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참석했던 한 인사는 “원칙적인 수준에서 얘기를 했다. 국회가 국조를 합의하면 어떻게 피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친이계 몇몇 강경파들은 친박과의 전면전도 불사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은 과거 수집했던 ‘박근혜 X파일’ 활용 여부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MB 측이 박 대통령과 관련된 고급 정보를 갖고 있다는 소문은 정치권에서 공공연히 돌았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경선 당시 국정원 내 ‘박근혜 TF팀’이 이 전 대통령을 도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바 있고, 민간인 불법 사찰 논란 때 박 대통령도 그 대상이었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에 대해 친박 역시 ‘발끈’하는 모습이다. 친박계의 한 재선 의원은 사석에서 “말로만 그러지 말고 한 번 해 봐라.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칼자루를 쥔 쪽은 우리”라고 잘라 말했다.
이와 관련, 감사원의 움직임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 감사원은 이명박 정부 자원외교 부분 감사를 진행 중이다. 황찬현 감사원장은 11월 13일 국회에 출석해 “감사 결과에 따라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건 묻고 사실상 중단시켜야 할 사업도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직 감사원장이 특정 감사에 대해 이처럼 단호한 입장을 밝힌 것을 놓고 정치권에선 여권 핵심부와 교감이 이뤄졌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는다.
친이계의 한 재선 의원은 “감사원의 자원외교 감사에 대해서도 불만이 팽배해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사자방 국정조사 요구까지 받아들인다면 친박을 상대로 우리도 싸울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