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건축 현장인 성북동 330-1번지 일대는 우리나라에서도 내로라하는 부호들이 살고 있는 동네다. 박물관 건축 현장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대가의 일원인 정대선-노현정 부부의 집이 있고, 인근에는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의 집도 있다. 천 회장의 집 역시 근처에 있다.
이 동네에 부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개발제한구역’(이하 그린벨트)인 북악산 자락에 위치해 자연경관이 탁월하고 공기가 맑기 때문이다. 또한 서민 거주지역과 떨어져 있어 상당히 조용하다.
박물관이 건축되는 곳은 다름 아닌 이 ‘그린벨트’ 지역이다. 이 지역은 비단 그린벨트로 묶여있을 뿐 아니라 대공방어협조구역, 문화재보존영향검토 대상지역, 제한보호구역 등 적어도 4~5개 법률에 의해 건축행위가 규제를 받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지역에 대규모의 사설박물관이 건축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곳에 박물관 건축이 가능했던 것은 그린벨트 지역에 공원, 박물관 등 공공복지시설에 한해 심의를 거쳐 인허가를 내주도록 한 관련법이 지난 2000년에 개정되면서부터다.
천 회장은 이곳에다 박물관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워 서울시에 심의를 요청했고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직시절이던 2002년 12월 서울시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서울시 도시공원설립을 최종 인허가하는 도시공원위원회에서 제동을 걸어 2006년 박물관 계획안은 반려됐다. 반려된 지 20일이 지난 후 세중문화재단 측은 최초 계획안과 거의 유사한 수정계획안을 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이 계획안은 곧바로 통과됐다.
우여곡절 끝에 옛돌박물관은 지난해 11월 공사를 시작하게 됐고 현재는 나무를 자르고 산을 깎아 내리는 공사를 진행 중이다. 현장은 그린벨트 지역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산림이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자연환경훼손이라는 주위의 비판 때문일까 시공사 측은 외부에서 공사 현장을 볼 수 없게 높이 10m 정도의 가림막을 설치했다. 모든 공사 현장 입구에 통상 붙어있어야 할 ‘공사개요’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공사가 어떤 공사인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
박물관 공사가 시작되면서 동네가 시끄러워졌고 산을 깎으면서 발생하는 먼지가 동네를 뒤덮었다. 산을 깎는 대규모 공사였기 때문에 이웃에 집 하나를 새로 짓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연스럽게 동네 주민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특히 인근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원성이 컸다.
재미있는 것은 벌써 몇 개월째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는 공사가 진행되어도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성북구청 공원녹지팀 관계자는 “공사와 관련해 단 한 건의 민원도 제기된 바 없으며 인허가 과정에서 문제가 될 소지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동네에 사는 한 주민은 “공사로 인해 생기는 불편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천 회장이 진행하는 공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물관이 완공된다 하더라도 문제의 소지는 다분하다. 현재 박물관은 성북동 330-1번지와 330-605번지 등 두 필지에 걸쳐 건축되고 있다.
성북구청 측은 330-1번지는 그린벨트이기 때문에 조경시설만 가능하고 건물은 그린벨트 지역이 아닌 330-605번지에만 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요신문>이 현장을 확인한 결과 두 필지의 경계선이 애매해 그린벨트와 비그린벨트 지역을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다시 말해 편법적으로 그린벨트 지역 일부를 걸쳐서 건물을 짓는다 해도 문제삼기 어렵다는 의미다.
공교롭게도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천 회장 소유의 세중옛돌박물관도 구설수에 올라 있는 상태다. 천 회장이 소유하고 있는 경기 용인시 양지면 양지리 12만여 평의 땅에 대형 송전탑이 관통할 예정이었으나, 설계 변경을 통해 2만여 명이 사는 인근 양지마을과 총신대 용인교정 쪽으로 노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전력은 수도권 및 경기 일대의 전력 공급을 늘리기 위해 지난 2005년 8월 신안성부터 신가평에 이르는 80㎞의 송전선로를 건설하는 사업을 승인했다. 선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송전탑 155개를 세워야 한다. 애초 설계안을 보면, 39~42번 송전탑이 천 회장 등이 공동소유한 12만 평의 땅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6월에 41·42번 송전탑이 자리를 옮겼고, 이명박 정부 때인 지난해 8월에 39·40번 송전탑이 자리를 옮기는 등 설계 변경이 이뤄졌다. 두 차례의 설계 변경을 통해 네 개의 송전탑은 천 회장 등이 소유한 땅의 한복판에서 200m 남쪽인 땅의 경계지역으로 자리가 바뀌었다. 하지만 송전탑이 옮겨진 곳은 총신대와 양지마을이 있는 곳으로, 주민들은 전자파 등의 피해와 불안감에 시달리게 됐고 현재 반대 서명운동 등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한전 측은 공사 강행 의지를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주민들과 총신대 측은 송전탑 설계 변경을 불법적인 권력형 비리로 규정짓고 “한전이 권력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천 회장은 얼마 전 포스코 회장 인선 때도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천 회장은 포스코 회장 인선 작업이 한창이던 지난 1월 12일, 유력 후보 중 한 명이었던 윤석만 당시 포스코 사장에게 전화해 ‘대통령이 승진에 부정적인 입장’이라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는 차기 회장이 결정되기 전날인 1월 28일에도 윤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이 정 사장으로 결정했다. 바꿀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현재 포스코 회장은 천 회장의 말대로 정준양 회장이다.
포스코 회장 인사 개입 의혹이 민주당 우제창 의원의 폭로로 드러나자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대통령의 측근이 민간기업 인사까지 개입하는 월권행위를 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런 구설수들이 하나둘 누적되면서 정치권이나 검찰 주변에서는 이명박 정권이 끝나면 천 회장이 박연차 회장과 같은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말마저 나돌기 시작했다. 실제로 검찰이나 국세청 정보 라인에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천 회장과 관련한 갖가지 범죄 첩보들이 보고됐다. 다만 정치권에서는 천 회장이 살아있는 권력과 가깝기 때문에 현정권에서 문제삼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박연차 게이트의 불똥이 엉뚱하게 천 회장에게 튀면서 그와 관련한 갖가지 의혹들이 검찰 수사의 대상이 됐고 결국 사법처리 일보 직전에 놓이게 됐다.
성북동 박물관 건축이나 양지 송전탑 변경 의혹을 천 회장 개인비리로 몰아가기는 어렵지만 이 사건들은 천 회장이 현 정권에서 가지는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그의 말 한마디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자랑했던 대통령의 ‘절친’ 천신일 회장은 어느새 또 다른 그의 ‘절친’인 박연차 회장과 같이 수감생활을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