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향소에서 한 참배객이 서럽게 오열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 부모님을 따라온 어린 아이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사진공동취재단 | ||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의 표정은 침통함 그 자체였다. 유시민 전 의원은 부산대 병원에서부터 조문객을 맞는 순간까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몰려드는 취재진에게도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의 슬픔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특히 취재진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이 자주 목격됐다. 마을 사람들은 이번 사태의 책임과 원인이 언론에 있다며 격앙된 분위기를 보였다. 마을회관 주변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대화는 기자들과 검찰에 대한 책임론이 대부분이었다.
장례 준비를 하는 모습을 취재하기 위해 마을회관 2층에 들어갔던 취재진들은 실랑이만 벌이다가 그곳을 빠져나왔다. 비서진 측에서 취재진을 위해 마련해 준 임시테이블을 주민들이 둘러싸고 ‘이곳에서 나가라’고 소리쳤다.
노사모 회원으로 보이는 40대 남성은 취재하는 기자들을 향해 “바위 밑으로 떠밀어낸 것은 현 정권 앞잡이 기자들, 검찰”이라고 몰아붙였다. 한 주민은 “단 하루만이라도 취재 없이 장례를 치르자”며 울먹였다. 영화배우 문성근 씨의 중재 끝에 오후 5시가 넘어서서야 취재활동이 가능해졌다.
23일 저녁 7시경에는 노사모 회원들이 반노 보수 성향 매스컴으로 지목된 일간지 소속 기자가 노사모 회관 앞에서 시민 200여 명에게 둘러싸여 폭행을 당할 뻔했다. 일부 장례 진행 요원들의 만류로 다행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 이 매체 소속 기자들은 노트북과 사진기 등에 붙어 있는 회사 스티커를 모두 떼어내고 나서야 취재에 나설 수 있었다.
또 다른 조문객은 모 방송사 카메라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대통령을 죽인 기자들이 어디 와서 취재를 하냐”며 몰아붙였다. 이에 카메라 기자가 “언론의 자유가 있는 것 아니냐”며 맞받아치자 급기야는 두 사람 간에 몸싸움이 일어났다.
모 통신사 기자는 마을 주민에게 몇 차례에 걸쳐 머리를 얻어맞았다. 술에 취한 한 남성이 취재를 하고 있던 이 사진기자의 머리를 다짜고짜 내리치기 시작한 것. 그러나 이 기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자리를 피해 상황은 일단락됐다. 사진기자가 흥분해서 맞대응했으면 큰 싸움이 벌어질 뻔한 상황이었다. 봉하마을에서 기자들은 불청객이었다.
몇몇 정치인들도 ‘수난’을 겪어야 했다. 정동영 의원은 ‘변절자’ 소리를 들어야 했고 한승수 국무총리는 버스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길에 물벼락을 맞기도 했다. 김근태 전 의원, 추미애 전 의원, 손학규 전 대표 등 이른바 비노(非盧) 세력들도 비난을 피해가지 못했다.
한 마을주민은 이들을 향해 “한나라당 ×××들이야 원래 그렇다 치고 당신들이 무슨 낯짝으로 이곳에 왔냐”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 다른 주민은 추 전 의원을 향해 “추미애 의원님, 노무현 대통령 힘드셨을 때 뭐 하셨습니까”라고 소리쳤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탓에 해프닝도 있었다. 23일 저녁 9시경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빈소에 도착하자 그를 알아본 몇몇 조문객들이 “이해찬이 왔다”라고 반가움을 나타냈다. 하지만 멀리 있던 한 노인이 이를 “이회창이 왔다”로 잘못 듣고 “여기 왜 왔냐?”며 고함을 지르며 앞길을 막아서려 했다. 이때 노인 옆에 있던 한 조문객이 “이회창이 아니라 이해찬이야”라고 하자 “아~ 해찬이는 와야지”라고 말하며 머쓱해왔다.
이 전 총리와 함께 있던 일행 중에 이상득 의원과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한 인물이 있자 멀리서 이를 본 조문객 중 몇몇이 “저거 이상득 아냐”라고 외치자 주변에 잠시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봉하마을에서 40년을 살았다는 석 아무개 씨는 기자에게 “오늘 마을 옆 개천에 70cm 정도되는 가물치가 나타났었다”며 휴대폰으로 가물치를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그는 “마을에 이만 한 크기의 가물치가 나타난 것은 25년 만의 일”이라며 “대통령님 돌아가신 걸 알고 가물치가 왔다”고 울먹였다.
조문을 온 사람들 사이에서도 실랑이가 벌어졌다. 조문 온 기자들과 정치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노사모 회원들에게 또 다른 지지자가 “그만 좀 하라. 일단은 장례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먼저 아니냐”며 다그쳤다.
공식분향소가 차려진 24일 정오부터는 더 많은 조문객들이 봉하마을에 몰려왔으나 비교적 정돈된 분위기 속에서 조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전직 대통령의 빈소에는 하루 종일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격앙된 분위기는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여전히 일부 노사모 회원들이 특정 매스컴과 정부 여당 등에 거센 비난을 보이며 관련자들의 조문을 막아서곤 했지만 다소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23일 밤 분향소로 향하는 2㎞가량의 조용한 시골길은 조문객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가족 단위의 분향객이 많았는데 아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서거와 조문 이유 등을 설명해주며 걷는 가족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런 조문객 행렬을 보며 한 조문객은 “보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물결을!”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렇게 봉하마을에서 대한민국 정치사, 민주주의사는 또 다른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었다.
김해 봉하마을=특별취재팀
(신민섭 박혁진 김장환 이윤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