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4일 전라남도 나주 수해피해현장을 방문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지난 29일 의원연찬회에서 비주류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국회사진기자단 | ||
이재오 의원이 “내가 당을 만든 사람인데, 당을 깰 수 있나. 그냥 웃고 넘어가야지”라며 정면충돌을 피했지만 이미 화살은 활을 떠난 뒤였다. 박 대표의 발언은 이재오 의원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작용했고, 한나라당은 당권을 둘러싼 전면대결의 국면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당장 전면투쟁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 서로 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확인한 만큼 사생결단의 시기만 남았다는 지적이다.
29일 의원연찬회에서 터져나온 박 대표의 발언은 이재오 의원 등 비주류의 잇단 박 대표 공격 뒤에 이뤄졌다. 박 대표는 작심한 듯 메모지에 메모를 해와 40여 분간 조목조목 비주류를 비판했다. 특히 대부분 이재오 의원에게 화살을 집중시켰다.
박 대표가 연찬회에 오기 전부터 작심했는지, 아니면 연찬회에 와서 돌발적으로 발언을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오래 전부터 쌓인 감정을 털어놓은 것만은 사실이다.
박 대표의 발언이 얼마나 강한지, 듣고 있던 의원들이 숨소리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박 대표는 ‘대표 흔들기 아니냐’ ‘치사하고 비겁하지 않느냐’ ‘나보고 대표 그만두란 말이냐’ ‘당을 떠난다고 했으면 약속을 지켜라’는 등 평소 어투가 아닌 상당히 공격적인 어투로 일관했다.
특히 박 대표는 “나를 비판하는 분 중 박근혜 대표가 되면 탈당 공언을 했다가 안했다. 정정당당하라. 탈당하겠다고 하면 지키고, 책임지고 그런 다음 비판하라. 그리고 지난 선거 때 그리 역사 죄 많은 대통령이라면, 죄인 딸이라면 왜 도와달라고 요청했냐. 또 내가 가겠다 해도 받아 들이면 안 되지. 스스로 생각해도 치사스럽고 비겁하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비판의 절정을 이뤘다. 이는 이재오 의원을 직접 겨냥한 말이다.
이 의원은 총선 기간 중 박 대표에게 지역구에 유세를 오라고 긴급 요청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유세요청을 긴급하게 여러 차례 했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이 의원에 대한 공격을 계속 이어갔다. 박 대표는 “한나라당은 5공·6공, 문민 정부를 거쳐 왔는데, 나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역사에 죄가 많은 정당이라 한다면 그때 한나라당을 택하지 않아야 하지 않느냐. 그 시절을 혹독히 비판하는 분은 지난 15·16대 실세, 당 좌지우지하던 분들이다. 그러면 그때 누구한테 사과하라 말라 할 필요없이 그 당시 대표에게 한나라당이 과거 역사 잘못된 정당이니, 한나라당 선택한 것도 이해 안 되지만, 아무튼 건의를 해서 사과했어야 한다. 그때 아무 말 없었다. 그때는 왜 사과 안 했냐.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추구하는 바가 뭐냐”고 직설법을 썼다. 이재오 김문수 의원 등은 이회창 전 총재 시절 측근으로 활동했다.
박 대표의 발언에 대해 의원들은 무거운 분위기였다. 말을 하기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우선 영남 보수파 의원들은 “할 말이 없다”면서 말려들어갈 것을 우려했다. 주류와 상당수 초선 의원들은 “이재오 의원이 너무 심하지 않았느냐”고 반응했다.
▲ 이재오 의원 | ||
박 대표가 워낙 강도 높게 비판하자 초선들은 일단 박 대표 편을 들고있다. 초선들은 이재오 의원에게 아무런 부채가 없는 반면, 박 대표에겐 부채를 크게 지고 있다.
재선 이상 의원들은 다르다. 이들은 이재오 의원의 잘못이 있지만 박 대표가 심했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당의 화합을 우선시하는 입장이다. 원래 정치하는 게 서로 싸우다가도 지도부가 무마하면 넘어가는건데, 박 대표의 정치력이 모자란다는 시각이다.
박 대표의 연설이 끝난 뒤 재선이상 의원들은 집중적으로 이재오, 김문수 의원 곁으로 다가가 술을 따뤄주며 위로했다. 이강두 이규택 최고위원뿐 아니라 원희룡 최고위원까지 이재오 의원을 위로했다.
이들은 이 의원이 자칫 즉흥적인 응대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까 우려하는 마음도 갖고 있다. 이 의원의 섣부른 판단을 잠재우려는 목적도 있는 셈이다.
재선 이상 의원들은 듣기 좋은 소리로 이 의원을 설득했으며, 이 의원도 ‘낭만에 대하여’란 노래를 부르면서 악몽을 떨치려 애썼다. 이 의원은 다음날인 30일 “이미 할말을 다했으니 침묵하겠다”며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대신 김문수 의원이 나서 박 대표를 비판했다.
김 의원은 기자들과 만나 “누가 만든 당인데, 나가라 말라 하나”면서 “박 대표야말로 뒤늦게 들어와 탈당했다가 복귀한 사람”이라고 맞받아쳤다. 나가려면 박 대표가 나가야 한다는 뉘앙스다. 김 의원은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싸울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도 했다.
어쩔수 없이 일전불사도 각오한다는 입장이다.
비주류의 상당수 의원들은 “지금 힘이 모자라 굴복하지만 나중에 보자”는 심정에 가깝다.
박 대표와 비주류 간의 대립은 사실상 대권과 연계돼 있다. 비주류 의원들은 박 대표로는 대권승리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이명박 서울시장이나 손학규 경기지사 등을 선호하는 그룹으로 분류된다.
박 대표도 비주류가 궁극적으로 자신을 지지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정면 승부에 나선 측면이 있다. 이제 이들은 서로 제 갈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오월동주처럼 잠시 같은 배를 타고 있지만 서로 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드러냈다.
박 대표도 전날 자신의 감정섞인 발언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박 대표는 의원연찬회 마무리 발언에서 “본의 아니게 분위기를 서먹서먹하게 했던 것 같다”면서 “널리 이해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을 뿐이다. 아직 분이 덜 풀린 모습이다. 비주류가 잘못했다고 굽히지 않는 이상 박 대표의 노기가 풀리지 않을 듯 싶었다.
비주류로서도 박 대표에게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저자세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마주 달려오는 열차인 셈이다.
이번 박 대표와 비주류의 정면충돌은 그런 점에서 예고됐던 일이고, 다만 예상보다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이란 해석이다. 정치공학을 싫어하는 박 대표가 정치적 해결보단 정면승부 기질을 보이면서 한나라당은 앞으로 크고 작은 격랑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박 대표는 당내 비주류뿐 아니라 기존의 정치 관행과 싸워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안고 있다.
생각보다 일찍 시작된 한나라당의 당권 및 대권투쟁은 당분간 더욱더 흥미진진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