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전 선동열 첫 억대 연봉, 올해는 평균 연봉 1억 원
프로야구 출범 33년 만에 처음으로 전 구단 선수들의 평균 연봉이 1억 원을 돌파했다.
#연봉 책정, 구단마다 다르다
각 구단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선수들의 연봉을 책정한다. 수도권 C 구단의 경우에는 구단 자체 고과 50%, 정규시즌 공식 기록 20%, 타석수나 투구이닝 10%, 1군 등록일수 10%, 코칭스태프 평가 10%를 두루 반영한다. 가장 비중이 큰 구단 고과 산정 시스템은 투수 쪽과 타자 쪽 모두 120개가 넘는 항목으로 세분화돼 있다. 숫자에는 드러나지 않는 팀 공헌도를 평가하는 요소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아무리 홈런과 타점이 많아도, 병살타를 많이 친 선수는 감점 요인이 크다. 그 병살타가 승부처에서 나왔다면 점수는 더 많이 깎인다. 대신 접전 상황에서 결승타를 쳤을 때는 플러스알파가 많이 붙는다. 같은 홈런이나 삼진도 경기 중 상황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앞서의 A 관계자는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다 평가하기 때문에 선수들의 생각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며 “한때 논란이 됐던 LG의 ‘윈 셰어 시스템’처럼 연봉 인상·삭감의 폭이 극단적으로 큰 사례가 아니라면, 대부분 구단의 연봉 산정에는 다 근거가 있다”고 설명했다.
#연봉 ‘협상’이 아닌 ‘통보’다?
구단이 제시한 연봉을 선수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연봉 협상 실무자인 운영팀장은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아야 한다. 스타일도 다 다르다. 선수들을 어르고 달래가며 사인을 하게 하는 팀장도 있고,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윽박지르는 팀장도 있다. D 선수는 “사실 운영팀장과의 평소 관계에 따라 협상 테이블 분위기가 달라지곤 한다. 좋은 사이로 지냈다면 분위기가 화기애애하지만, 그 반대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인상만 쓰다 나온다”면서도 “웃으며 얘기하든 화내며 얘기하든 결과는 똑같다. 연봉 ‘협상’이 아니라 ‘통보’이기 때문”이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앞서의 B 선수 역시 “협상의 여지도 없다. 요즘은 구단이 아예 설명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연봉 협상 담당자들은 “오히려 요즘처럼 구단 산정액을 확실하게 밝히는 방식이 더 신뢰도를 높인다”고 입을 모은다. E 구단 관계자는 “예전에는 선수에게 1억 원을 주고 싶으면 일단 8000만 원을 불러 놓고 시작했다. 일부러 약하게 제시한 다음 금액을 올려야 선수가 ‘내가 2000만 원을 더 받아냈다’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렇게 선수를 심리적으로 이용하는 것보다는 그냥 ‘구단이 줄 수 있는 최대치가 이 정도’라고 얘기하고 물러서지 않는 게 더 정직한 방법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협상을 질질 끌지 않고 확실한 구단의 뜻을 보여줘야 선수의 결정도 오히려 빨라진다는 얘기다.
구단들은 연봉 책정 시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평가하기 때문에 선수들의 생각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사진제공=삼성라이온즈
#천차만별 선수들의 협상 스타일
당연히 선수들도 성격에 따라 다른 태도를 보인다. 협상 담당자들이 가장 애를 먹는 유형은 ‘묵묵부답 형’이다. E 관계자는 “한 젊은 투수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도 씩 웃고, 구단이 금액을 제시해도 씩 웃기만 했다. 자신의 요구액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만 있는데, 그렇다고 순순히 사인도 하지 않는다”며 “차라리 ‘마음에 안 든다. 더 올려 달라’고 허심탄회하게 불만을 얘기하는 선수들이 협상하거나 설득하기에는 훨씬 낫다”고 했다. 악바리로 소문났던 F 코치는 현역 시절 늘 연봉 조정 신청 기한 직전까지 구단의 애를 먹이다 막판에야 사인하는 선수로 유명했다. F 코치가 소속됐던 구단 관계자는 “아예 첫 제시액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큰 생수통과 같은 구단 사무실 집기를 집어 던지기도 했다. 본인 나름의 기싸움이었던 것 같다”고 증언했다. 반면 G 해설위원은 늘 첫 번째 협상에서 구단 제시액에 군소리 없이 도장을 찍어 ‘스토브리그의 신사’로 통했다. 그런가 하면 H 감독은 선수 시절 “구단의 일방적인 통보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직접 논리적인 이유를 담은 연봉 관련 리포트를 제출하기도 했다. 결국 본인의 요구액을 관철시켰다.
#연봉 협상 내용, 공개되면 골치 아파진다
모두가 계약을 끝냈는데 단 한 명이 미계약자로 남으면, 대중은 양측의 입장 차이가 얼마나 큰지 궁금해 한다. 자연스럽게 구단 제시액과 선수의 요구액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다. 앞서의 E 관계자는 “그 순간 구단은 선수의 제시액을 수용하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했다. “다른 선수들에게 ‘오래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는 인상을 심어주게 되고, 결국 이듬해 연봉협상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물론 선수에게도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실제로 한 구단의 간판선수인 I는 2월 중순까지 연봉 계약을 마치지 못한 적이 있다. 1000만 원에 대한 의견차를 좁히지 못해서다. I 선수는 같은 팀의 동기생 투수와 금액을 맞춰달라고 주장했고, 구단은 고과에 따라 정확하게 산정한 금액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선수와 구단이 반반씩 양보해 구단 제시액보다 500만 원 많은 금액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결국 선수의 승리였다. 구단이 “남은 500만 원은 옵션으로 따로 챙겨주겠다”고 설득한 것이다. 게다가 그 옵션은 성적이 아닌 출장 경기수. 그렇게 구단은 명분을 챙기고 선수는 실리를 챙겼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25% 상한선’ 그때를 아시나요 날고 기어도 연봉은 ‘거기서 거기’ 한화 류현진은 2006년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와 신인왕을 석권했다. 이듬해 그의 연봉은 2000만 원에서 1억 원으로 400% 올랐다. 두산 유희관은 2013년 데뷔 첫 풀타임 선발로 10승을 따낸 뒤 연봉이 285%(2600만 원-1억 원) 인상됐다. 이뿐만 아니다. 2012년 정규시즌 MVP 박병호는 연봉이 6200만 원에서 2억 2000만 원으로 수직상승했다. 인상률은 254.8%였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1980년대 프로야구 선수였다면 어땠을까. 류현진은 2500만 원, 유희관은 3000만 원, 박병호는 7750만 원밖에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다행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연봉 25% 인상 상한선’ 때문이다. 고 최동원은 처음으로 ‘25% 상한선’을 깼지만 KBO에 공식 등록되지는 않았다. 연합뉴스 이 ‘악법’은 1983년 처음으로 도입됐다. 정작 프로야구의 헌법과도 같은 야구 규약에는 명시되지 않았다. 그만큼 이상한 제도였다. 당시 프로야구 신인 기본 연봉은 1200만 원. 아무리 야구를 잘해봤자 1200만 원∼1500만 원∼1875만 원∼2343만 원으로 정해진 계단을 밟아 올라가야 했다. 예를 들어 MBC 김건우는 1986년 1200만 원을 받으면서 18승을 올렸지만, 이듬해 연봉이 불과 300만 원 올랐다. 구단이 2000만 원의 보너스를 따로 챙겨줬지만, 성에 찼을 리 없다. 선수들도 끊임없이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스타플레이어가 즐비했던 해태는 비시즌 때마다 몸살을 앓았다. 협상 담당자들은 선수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정에 기대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집값과 생활비가 쌌던 ‘광주 물가’ 논리를 앞세우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에게는 모기업 CF 촬영을 주선해 출연료를 챙겨주는 방법도 썼다. 이 상한선을 처음으로 깬 인물은 고(故) 최동원으로 알려져 있다. 1984년 정규시즌 27승과 한국시리즈 4승을 올렸지만, 롯데가 제시한 금액은 연봉 3472만 5000원과 보너스 3000만 원뿐. 최동원은 “내가 25% 상한선 폐지의 십자가를 지겠다”면서 구단과 끝까지 맞섰다. 연봉 6500만 원을 요구해 결국 받아냈다. 그러나 그해 KBO에 공식 등록된 최동원의 연봉은 규정대로 딱 25%만 오른 금액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 제도는 1990시즌이 끝난 뒤에야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선수들은 그때부터 진짜 ‘프로’가 됐다. [은] |
연봉조정신청 ‘끝까지 가면 선수 손해’ 이대호 일본행엔 그때의 앙금이? 연봉 조정 신청. 구단과 소속 선수가 매년 1월 10일 이전까지 연봉 계약에 합의하지 못했을 때, 한국야구위원회(KBO)에 결정권을 넘기는 제도다. 만 3년 이상 프로야구에서 뛴 선수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구단과 선수는 연봉 조정 신청 마감일 이후 5일 이내인 1월 15일까지 각각 주장하는 연봉 산출 근거 자료를 KBO에 제출해야 한다. 일단 한 번 KBO로 공이 넘어간 이상, 양 쪽 모두 결과를 무조건 수용하는 게 원칙이다. 구단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선수의 보류권을 잃고, 선수가 거부하면 임의탈퇴로 묶여 최소 1년간 뛸 수 없다. 지금까지 구단과 선수가 정말로 ‘끝까지’ 대립한 사례는 총 20회에 불과했다. 1984년 해태 강만식과 MBC 이원국이 시작이었고, 2011년 롯데 이대호가 마지막이었다. 2002년에는 LG에서만 김재현, 이병규, 전승남, 유지현까지 총 네 명의 선수가 연봉 조정을 신청하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 유일한 승자는 유지현. 구단은 전년도 연봉 2억 원에서 1000만 원 삭감된 1억 9000만 원을 제시했지만, 유지현은 2억 2000만 원을 요구해 결국 이겼다. 스무 번 열린 연봉 조정위원회에서 선수가 자신의 요구액을 인정받은, 유일한 사례였다. 나머지 열아홉 번은 모두 구단이 이겼다. 1991년의 롯데 김시진과 OB 장호연, 1992년의 삼성 이만수, 1994년의 해태 조계현 등 쟁쟁한 선수들도 예외는 없었다. 그러나 유일한 승자인 유지현 코치에게도 상처는 남았다. 구단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뎌야 했다. 선수 생활도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게다가 연봉 조정 신청 사례가 나올 때마다 언론의 인터뷰 공세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됐다. 유 코치의 조언은 한결같다. “끝까지 가지 말고 웬만하면 구단과 타협을 보라”는 것이다. 실제로 2009년에는 두산 정원석이 연봉 조정신청서를 냈다가 37분 만에 철회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구단 제시액은 4200만 원, 정원석의 요구액은 4400만 원. 불과 200만 원 차이로 감정싸움을 벌이다가 터진 일이었다. 그 37분의 여운은 예상보다 더 길었다. 정원석은 2009시즌을 끝으로 두산에서 방출됐다. 가장 관심을 모았던 연봉 조정 신청자는 아마도 2011년의 이대호(당시 롯데)였을 것이다. 이대호는 그해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을 휩쓸면서 7관왕에 올랐다. 9연속경기 홈런이라는 세계 기록도 세웠다. 연봉 협상 테이블에서 3억 9000만 원이었던 연봉을 7억 원으로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롯데는 6억 3000만 원을 제시했다. 7000만 원의 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이대호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팀 형평성을 이유로 빼어난 개인 성적에 비해 연봉을 거의 올려 받지 못했던 아쉬움을 토로하며 맞섰지만, 롯데는 2003년 삼성 이승엽이 받았던 연봉보다 많이 줄 수는 없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조정위원회는 늘 그랬듯 롯데의 손을 들어줬다. 이대호는 1년 뒤 FA(프리에이전트) 자격을 얻었고, 롯데의 4년 100억 원 제안을 뿌리치고 일본으로 날아갔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