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국보 1호 지정 10만 서명운동’에 나선 혜문스님.
숭례문 대신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지정하자는 서명운동에 참여한 국민들이 12월 12일 현재 5만 명을 넘어섰다.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스님은 지난 11월 11일 ‘훈민정음 국보 1호 지정 10만 서명운동’ 발대식을 갖고 국민들에게 서명운동에 적극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혜문스님은 “내년 1월 11일까지 서명운동을 진행한다. 2015년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자 감사원이 숭례문 국보 1호 해지를 권고한 지 10년이 되는 해다. 광복 70주년 사업으로 국보 1호를 훈민정음으로 변경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문화재청에 접수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훈민정음 국보 1호 지정 10만 서명운동’이 힘을 얻고 있는 데에는 숭례문 부실 복원 논란이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복원이 완료된 숭례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청이 벗겨지는 현상이 발견됐다. 이어 기둥과 서까래 곳곳에서 균열 현상이 나타났다. 숭례문 복원 공사를 총지휘했던 신응수 대목장의 ‘소나무 바꿔치기’ 의혹까지 불거지자 국보 1호 숭례문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했다.
숭례문 대신 국보 1호를 훈민정음으로 바꾸자는 목소리를 내온 혜문스님은 “국보 1호 숭례문은 복구과정에서 각종 비리와 부실로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 줬다. 더 이상 국보 1호로 서의 품격유지와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올해 3월 나선화 문화재청장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숭례문이 국보 1호의 지위를 계속 유지해야 할지에 대한 국민적 공론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조선총독부가 숭례문을 ‘조선고적1호’로 분류한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는 주장도 숭례문의 국보 1호 지위를 흔들리게 하는 대목이다. 학계는 일제강점기 당시 교통 장애를 이유로 숭례문을 헐어버리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 무장인 가토 기요마사가 숭례문을 통해 입성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보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2003년에는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조선성곽 정책을 연구해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 특별연구원이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지나갔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 때 숭례문이 헐리지 않고 보존됐다’는 내용이 담긴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그간 숭례문 국보1호 지정문제는 왜색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혜문스님은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였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숭례문을 통해 한양에 출입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 때의 지정번호를 그대로 답습, 숭례문을 국보 1호로 다시 지정했을 뿐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숭례문은 국보 1호에서 해지됐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복수의 전문가들은 국보 1호 교체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국보 1호를 바꾸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6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보 1호를 조선총독부가 지정한 것은 적절치 않다며 국보 1호에서 해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화재위원회가 반대하고 나서면서 무산됐다. 2005년에는 감사원이 국보 1호를 바꾸자고 정부차원에서 문화재청에 의견을 개진했지만 문화재위원회는 ‘사회적 혼란’을 이유로 부결시켰다. 국보지정 권한을 가진 문화재위원회는 교체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국보 뒤에 붙는 번호는 가치 순서가 아니고 단순한 관리번호”라며 국보 1호라는 번호가 무의미하다고 강조했다.
40여년간 국내외 건축문화재 발굴·복원 작업에 몸담았던 윤홍로 전 문화재위원(69)은 “일각에서 국보 1호를 교체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도 이해한다. 문화재청에 몸담고 있던 시절 나 역시 고민했던 문제”라며 “그러나 국보 1호라고 해서 가치가 1등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국보 뒤에 붙는 숫자는 서울-경기-강원-충청 등으로 이어지는 행정구역상의 관리번호에 불과하다. 국보 번호도 광복 후 다시 지정한 것”이라며 왜색 논란을 일축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문화재위원은 “문화재와 관련해 산적해 있는 문제들이 많다. 국보 지정 순서를 바꾸는 것으로 필요이상의 혼란이 가중된다면 그것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라면서도 “프랑스와 중국 등 상당수의 나라는 국보에 번호를 붙이지 않고 있다. 국보 1호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이는 국민들이 많은 만큼 지정 번호를 삭제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혜문 스님은 “국보 1호라는 것은 상징성이 크다. 국보 1호 교체문제는 역대 대통령마다 정부차원에서 제안했던 문제”라며 “창조성과 위대성을 가진 훈민정음이 국민이 사랑할 수 있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국보 1호로 적절하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