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5일 MBC의 <시사매거진2580>에 출연해 “국가보안법 같은 낡은 유물은 폐기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이른바 ‘국보법 폐기 발언’을 하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6일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비롯한 여당의 개정파 의원들이 의견일치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대통령이 국보법 폐기 카드를 빼들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폐지론’과 ‘개정론’으로 분열된 가운데 대통령의 ‘폭탄 발언’이 나와 당내 분위기는 어수선한 상황. 특히 노 대통령과 이해찬 총리도 ‘폐지’와 ‘개정’으로 의견이 엇갈리면서 혼란은 가중됐다. 이 총리는 지난달 24일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과의 오찬 자리에서 국보법 개폐와 관련해 “정치적으로 볼 때 폐지하는 것보다는 개정하는 게 낫지 않으냐”고 말했다. 이 총리가 국보법 개정 쪽으로 무게를 뒀던 것이다.
노 대통령도 그때까지는 국보법 개폐문제와 관련해 뚜렷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에 정치권에선 국보법 개정을 시사한 이 총리의 발언을 놓고 ‘노심’(盧心·노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그런데 이 총리의 국보법 개정 발언이 나온 지 12일 만에 ‘노심’은 ‘국보법 폐지’에 있었음이 드러났다. 대통령과 총리가 국보법 개폐와 관련해 입장차이를 보였던 것.
이 총리의 한 측근은 이와 관련해 “국무총리로 임명되기 전에 이 총리는 국가보안법 개폐문제에 대해 ‘폐지 수준의 개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총리가 된 이후 자신의 생각보다 ‘우향우’하는 발언과 행보를 보였다. 우선 총리로서 내각을 관리해야 하고 국민과 야당에게 최대한 안정감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발언이 ‘(국보법을) 개정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뜻을 집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총리도 이번 대통령의 발언대로 따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발언은 또 20여 명의 열린우리당 개정파 의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폐지론자(80여명)보다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그 세를 확장해가고 있던 시점에 대통령의 발언이 나왔기에 당혹감은 더했다. 국보법 개정파를 대표하는 안영근 의원은 6일 전화통화에서 “현재의 남북관계와 여론, 보수파의 반발 등을 고려했을 때 일단은 대폭적으로 개정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국보법을 개정했다가 장기적으로는 사문화시키는 방법을 채택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의 평소 소신(국보법 폐지)이 발표된 것이어서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면서도 “대통령 발언으로 인해 당내 분열이 심해지는 것으로 비쳐질까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또한 “당론이 결정 나기 전까지는 폐지론을 주장하는 의원들과 계속 논의해나가겠다”고 밝혀, 대통령의 발언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대통령의 발언 이전에 청와대가 이 총리와 개정파 의원들에게 의중을 전달하지 않았겠느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청와대 김종민 대변인은 전화통화에서 “대통령의 발언이 있기 전에 특별히 국보법 개정을 주장하는 분들과 사전 조율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대통령은 국보법도 청산해야 할 과거사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처음부터 여당 내에서 국보법 문제로 논란이 확산되자 조속히 당내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 싶다. 그래야만 앞으로의 과거사 청산 작업에서도 탄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