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인 지난 2000년 9월22일, 이 도로 옆에 위치한 북한강변 늪지대에서 그랜저 승용차 한 대가 거꾸로 처박힌 채 발견됐다. 도로확장공사 도중 한 인부가 우연히 발견한 것.
차적 조회결과 이 차는 발견 시점으로부터 3년3개월 전인 지난 97년 6월26일 한 렌트카회사로부터 변동환씨(가명•사망당시 34세)가 빌린 승용차로 판명됐다.
변씨는 당시 박세아씨(가명•사망당시 32세)라는 여자와 함께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하지만 인양된 차 안에서 두 사람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남녀의 실종과 3년 만에 건져올린 승용차. 그날 밤, 문제의 차 안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차체를 인양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변씨 차량에 동승했던 박세아씨 유족들은 차량 보험회사를 상대로 지난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운전자인 변씨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겠지만 변씨가 사망한 이상 승용차 보험회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박씨 부모들이 생각하는 그날 밤의 ‘진실’은 이렇다. 딸이 변씨가 빌린 승용차에 탄 뒤 그의 운전부주의로 강물에 추락해 익사했다는 것. 하지만 보험사의 의견은 달랐다. 박씨가 변씨가 사망할 때 함께 있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
설사 동승을 했더라도 운전자 변씨가 오랜 연인관계였던 박씨의 변심 때문에 동반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박씨 유족들이 소송에서 승소하기 위해서는 박씨가 그랜저 승용차안에 변씨와 동승해 있었다는 사실과, 사인도 자살이 아닌 사고사였음을 증명해야만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3년 만에 건져 올린 승용차 안에는 유족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단서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차체 전부가 진흙탕 속에 거꾸로 처박힌 채 세 차례나 여름과 겨울이 오갔고, 또 홍수 탓에 사체는 물론 변변한 유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차체는 조수석 앞 범퍼 모서리 부위와 앞 유리, 우측 앞뒤 창문 그리고 좌측 뒷문 유리가 완전히 파손된 상태였다. 좌측 앞문 유리는 깨지지 않은 상태로 앞문이 닫혀 있었고 운전석 뒷좌석에는 진흙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운전석 진흙 속에선 남자용 손목시계와 휴대폰이 배터리와 분리된 채 발견됐다. 또 조수석에선 여자 핸드백과 검정색 하이힐 한 짝이 발견됐다.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예상밖의 물건이 눈에 띄었다.
조수석 옆 깨진 유리창 밖 후사경에 마치 누군가 일부러 묶어놓기라도 한 것처럼 여성용 나일론 팬티스타킹이 걸려 있었던 것.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스타킹 속에는 스타킹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골반뼈와 다리뼈가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는 사실이다.
뼈가 흩어지지 않도록 스타킹이 일종의 보호막 역할을 했던 것. 소송이 시작되자 우선 박씨가 변씨와 승용차에 동승하고 있었는지 여부가 쟁점으로 부각됐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박씨의 유가족측은 차 안에서 발견된 핸드백과 검정색 하이힐을 증거로 내세웠다.
핸드백과 하이힐 모두 자신이 언니 생일선물로 줬던 것이라는 게 박씨의 동생 고은씨(가명)의 진술. 하지만 이 주장만으로는 사고 당시 박씨가 승용차에 동승하고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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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가 실종된 지난 97년 당시 나이는 32세. 골반뼈의 주인이 박씨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제 남은 것은 박씨의 키. 공교롭게도 박씨의 최종학력이 중학교 중퇴였던 관계로 성장기 이후 박씨의 키가 기록돼 있는 공식문서는 전혀 없었다.
유가족들은 간접증거로 사고나기 몇 달 전 박씨가 동생 고은씨와 나란히 찍은 사진 몇 장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사진 속 박씨는 동생 고은씨보다 다소 작은 키의 소유자였다.
법원은 고은씨의 키를 직접 재봤고 그 결과 키가 정확히 160cm임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사진 속 박씨의 신장은 150~155cm 정도인 것으로 짐작됐다. 다리뼈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신장과 비슷한 수치였다.
결국 차안에서 발견된 핸드백과 구두, 그리고 나일론 스타킹 안에 남아 있던 골반뼈와 다리뼈의 정밀감정 등의 증거가 절묘하게 어우려져 박씨가 차 안에 타고 있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하지만 유족들에게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더 있었다. 바로 재판의 또 다른 쟁점인 사고원인을 규명하는 것. 보험사측은 다시 사고 당시 변씨와 박씨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점을 근거로 ‘동반자살극’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마침 당시 유부남이었던 변씨는 이혼까지 각오하고 박씨와 교제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박씨가 하루아침에 마음이 변해 헤어지자는 말을 건네자 변씨가 흥분했다는 것. 변씨는 박씨의 마음을 되돌릴 목적으로 최고급 승용차인 그랜저 승용차를 빌려 북한강 강변으로 드라이브를 하며 설득해보려 했지만 박씨는 생각보다 훨씬 완강했다는 것.
이에 이성을 잃은 변씨가 박씨와 함께 강변 아래쪽으로 동반자살을 했다는 것이 보험회사측의 시나리오다. 이런 경우 교통사고가 아니라 변씨가 고의로 박씨를 살해한 것이기 때문에 보험사는 박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유족들은 사고 당시 변씨와 박씨와의 사이가 동반자살을 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였다고 반박했다. 그 근거로 사고가 난 것으로 추정되는 1997년 6월30일 새벽 3시께, 박씨의 동생 고은씨가 언니와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내용을 내세웠다. 당시 박씨는 동생에게 웃으면서 “빨리 집에 돌아갈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했다는 것. 고은씨는 전화상으로 느낀 당시 상황은 전혀 공포스럽거나 흥분된 상태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고은씨는 또 변씨와도 잠깐 통화를 했지만 그에게서도 전혀 흥분된 목소리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보험사측과 유족들의 주장이 다시 팽팽히 맞선 상황.
실마리를 풀 단서는 3년 만에 인양된 승용차에서 나왔다. 발견 당시 승용차 키박스에는 승용차 열쇠가 스타트(ON) 상태로 꽂혀 있었고, 자동변속기가 중립상태(N)에 놓여 있었으며, 전조등 스위치는 상향등 상태로 되어 있었다.
유족들은 이 가운데 자동변속기와 전조등의 상태에 주목했다. 우선 자동변속기가 중립(N)상태였다는 것은 적어도 사고당시 자동차가 정지상태(P)가 아닌 주행상태(D)에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주장.
자동변속기에서 중립(N)과 주행(D)은 불과 한칸 차이로 충격이 전해질 경우 서로 바뀔 수도 있으나 정지(P)상태에서 중립(N)상태로 옮기려면 자동변속기 위의 별도 버튼을 눌러야 하기 때문이다.
또 전조등이 상향상태였다는 것은 자동차가 당시 고속주행중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단서라는 설명이다. 결국 변씨 승용차의 추락은 주행중 교통사고로 봐야 한다는 게 유가족측의 주장.
한 편의 추리소설 같은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법 민사66단독 정재오 판사는 1년여 동안 심리 끝에 결국 지난 3일 판결을 내렸다. 정 판사가 선택한 결론은 유가족들의 주장대로 “박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에 재판부는 보험회사측에 박씨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각각 7천6백만원씩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또 박씨의 죽음에 정신적 충격을 입은 동생들 4명에게도 50만원씩의 위자료를 인정해 모두 1억5천4백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3년이 넘는 기간동안 물속에 잠긴 채 시체까지 사라져버려 자칫 영구미제로 남을 수도 있었던 이 미스터리극은 일단 이렇게 막을 내렸다. 물론 패소한 보험사측이 재판부의 판결에 불복해 항소 의사를 밝힌 상태여서 ‘미스터리극 제2편’은 계속될 전망이다.
하지만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일론 스타킹의 ‘끈질긴 생명력’은 재판이 끝난 뒤에도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위치상 물에 쓸려내려갈 수 없던 지점이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필사적으로 알리려는 박씨 영혼의 힘은 아니었을까. 조민수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