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대 호스트바 종업원인 피의자 세 명이 범행을 재연하고 있다. | ||
이들은 숨진 김씨가 명품 의류와 중형차를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급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몰래 찾아가 몹쓸 짓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평소 명품을 쫓다 카드빚에 시달려 결국 소중한 인명을 해친 세 명의 젊은이, 그리고 유흥업소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호화생활을 하다 범행의 표적이 된 여성, 이들 네 젊은이가 빚어낸 씁쓸한 비극의 현장을 뒤쫓아가봤다.
지난 11월 초 어느 날 20대 청년 두 명을 태운 중형승용차 한 대가 강남의 밤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한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돈에 쪼들려 죽겠다.” 이어 차 안에 있던 다른 사내가 자신도 마찬가지라며 시무룩하게 맞장구쳤다. 이 두 사람은 4개월 전 강남구 신사동 P호스트바에서 만나 친해진 강연과 종선.
이들은 이 업소에서 속칭 ‘선수’(호스트)로 일하며 각각 적게는 2백만원에서 많게는 5백만원에 이르는 월급을 받았다. 하지만 강연의 경우 3천만원 상당의 체어맨 승용차 할부금과 한 달에 1백20만원에 이르는 오피스텔의 월세를 내는 것만으로도 생활이 빠듯했다.
여기에 호스트바를 찾는 여자 손님들에게 ‘뺀찌’(거절)를 당하지 않으려면 명품의류로 치장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지난 2년 동안 호스트바에서 일하며 남긴 것이라곤 카드빚뿐이었다.
종선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 대학 연극영화과를 휴학한 뒤 방송국에서 단역을 몇 차례 맡기도 했지만 결국 흘러들어간 곳은 호스트바였다. 그곳에서 웬만한 월급 생활자들의 급여를 몇 배 뛰어넘는 수입을 올렸음에도 카드빚은 계속 늘어만 갔다.
구두부터 옷,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명품족 신분을 유지하기에는 그 월급도 부족했던 것. 승용차 안에서 신세한탄을 주고받던 종선과 강연. 두 사람의 대화는 강연이 “혹시 네 주변에 돈많은 사람 없냐”라는 말을 꺼내자 묘하게 전개됐다.
경찰은 이 무렵 이들이 이미 모종의 ‘일’을 벌이기로 계획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부터 이들은 돈많은 여성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범행대상은 강연의 친구를 통해 알아낸 속칭 ‘청량리 588’의 윤락녀 ‘수지’(가명). 범행에 대한 모의가 이뤄진 뒤 이 두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강연의 친구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강연의 친구는 “청량리 윤락녀 수지라는 여자가 있는데 일한 지가 오래돼서 돈이 굉장히 많다”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강연의 친구는 별 생각없이 한 이야기였지만 두 사람에게는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며칠 뒤 종선은 강연의 친구를 다시 만났다. 목적은 친구의 휴대폰에 저장된 수지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것. 전화 한 통만 하자며 친구의 휴대폰을 빌린 두 사람은 몰래 수지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후 강연과 종선은 이동통신사 직원을 사칭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주소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지는 순순히 집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다음에는 아파트 관리실 직원으로 위장해 다시 한번 아파트 호수를 알아내려 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 여성이 바로 일본인 ‘하나코’(가명). 두 사람은 호스트바 손님으로 찾아와 알게 된 이 여성의 집을 찾아 강남 A호텔 뒤편으로 차를 몰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당시 하나코는 이미 집을 옮기고 난 뒤였다. 두 번의 시도가 물거품이 된 이들은 지난 11월23일쯤 친구를 통해 알고 있던 이경란씨(가명/24)를 대상으로 세 번째 범행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에 그쳤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이들은 ‘한탕’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 11월29일 두 사람은 새로운 멤버 홍석과 경기도의 한 스키장을 찾았다. 홍석은 강연과 4년 전 대전의 한 가라오케에서 만나 친분을 이어오던 사이. 이날 오후 2시께 돌아오는 길에 홍석이 우연히 ‘진짜 돈 많은 여자’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강연과 종선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홍석을 통해 ‘돈 많은 여자’ 김하나씨의 모든 것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홍석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10월 말 홍석이 일하고 있던 잠원동 D호스트바에 손님으로 찾아왔던 강남 모 룸살롱의 호스티스였다. 그 이후에도 그녀는 홍석의 호스트바를 몇 차례 더 찾아와 단골이 됐다.
지난 11월 초에는 홍석이 그녀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다. 평소 명품 의류와 액세서리로 치장하는 것은 물론 현금도 많이 가지고 다녔던 것이 홍석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 그날 밤 11시, 강연의 오피스텔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마침내 범행을 결심했다.
이들이 세운 범행계획은 이랬다. 피해자 김씨의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녀가 귀가해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뒤쫓아들어가 해치운다는 것.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김씨가 거주하는 서초구 D아파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사람.
다음날 새벽 3시께 그녀의 승용차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이들은 각본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김씨가 주차하는 동안 먼저 그녀가 사는 17층으로 올라가 잠복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녀가 애초 알고 있던 17XX호가 아닌 옆집으로 들어가자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범행 대상으로 점찍어두었던 김씨가 아닌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이 때문에 두 사람은 그 시각 호스트바에서 잠을 자고 있던 홍석을 호출했다. 김씨의 집을 직접 방문해본 홍석을 차에 태운 두 사람은 “오늘이 아니면 범행할 수 없다”며 그를 설득했다. 이후 이들은 홍석을 앞세우고 직접 피해자 김씨의 집으로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다.
영문도 모른 채 새벽에 찾아온 ‘손님’에게 문을 열어준 김씨는 다짜고짜 들이닥치는 이들 세 사람에 의해 결국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김씨를 살해한 이들 세 사람은 집안을 뒤져 시가 1천5백만원 상당의 명품 시계와 현금 1백만원을 훔친 뒤 유유히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또 김씨를 살해하기 직전 그녀로부터 알아낸 카드 비밀번호를 통해 3천4백만원의 현금을 인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범행은 금세 들통나고 말았다. 가족들의 신고로 수사에 나선 경찰이 현금을 인출하는 피의자들의 모습이 찍힌 CCTV 화면을 토대로 추적에 나섰던 것.
결국 경찰에 붙잡힌 이들은 “피해 여성과 가족분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고개를 떨구었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