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서울의 한 지하철 역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들의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련없음. | ||
이런 믿지 못할 사실은 경찰이 ‘CJ엔터테인먼트 소포 폭발물 협박 사건’을 수사하던 과정에서 드러났다. ‘폭발물 협박 사건’의 범인에게 자신 명의로 통장을 만들어주는 대신 수수료를 챙겼던 노숙자가 바로 수억원대의 부동산 부자로 밝혀진 것.
하지만 경찰은 “문제의 부동산이 노숙자의 재산이 아니다”라고 추정한다. 주변 정황으로 보아 모종의 사기집단에 노숙자가 악용 당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예의 노숙자는 “그 부동산들은 내 재산”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변변한 직업이 없이 거리를 배회해온 노숙자. 대체 그의 수억원대 재산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경찰도 이 점에 강한 의문을 갖고 수사를 진행중이다.
세상을 놀라게 했던 폭발물 협박사건의 불똥은 이제 또 다른 곳으로 옮겨붙고 있다. 지난해 12월27일 오후 4시께, 서울 중구 남대문로 5가 CJ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사무실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소포로 배달된 서적 안에 폭발물이 설치돼 있었던 것.
이 폭발 사고로 사장 이강복씨(50)는 가벼운 화상을 입었다. 이른바 ‘소포 폭발물 협박사건’이 터진 것이다. 경찰은 이 사건과 12월5일 서울 구로동 애경백화점 8층에 있는 구로 CGV극장관에 폭약 없는 사제폭탄이 설치됐던 사건의 범인을 동일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의 근거는 이렇다. 우선 두 사건에 사용됐던 폭발물 구조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 또 27일 CJ엔터테인먼트로 배달된 폭발물 서적에 끼워져 있던 협박문 내용이 5일 사건과 연관된 점. 그리고 용의자의 협박전화 음성 분석결과 동일인으로 나타났다는 점 등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믿기 힘든 사실’ 하나가 발견된다. 그것은 폭발물 협박범이 CJ엔터테인먼트에 전화 걸어 ‘2천만원을 입금하라’며 알려줬던 은행 계좌의 주인이 수억원대 재산을 갖고 있는 노숙자라는 점이다. 노숙자 박아무개씨(50)가 그 장본인.
박씨는 협박범에게 자신의 명의로 차명 은행 계좌를 만들어주고 돈을 받아 챙긴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받았다. 박씨는 이번 사건의 범인을 지난 10월9일 종묘공원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진술했다. 그는 “그 사람(협박범)이 내가 만들어준 통장으로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며 이번 사건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범인에게 계좌를 ‘판’ 노숙자 박씨를 조사하던 중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둘 드러났다. 노숙자하면 흔히 집도 절도 없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길거리를 배회하는 사람이 연상된다. 이번 사건과 연루된 노숙자 박씨도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이 ‘거리의 사람’이었다는 게 경찰의 전언.
실제로 박씨도 여느 노숙자처럼 서울역과 종로 일대를 배회하며 구걸하거나, 자선단체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식사로 끼니를 해결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씨를 노숙자라 부르기에는 왠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서울 시내에 박씨 명의로 된 주택이 세 채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던 것.
경찰은 주택 3채 값을 모두 합하면 5억원은 족히 넘을 것으로 추산한다. 또 박씨의 통장에도 수백만원이 입금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면 어엿한 ‘집주인’이면서도 노숙자 생활을 전전하는 박씨의 정체는 무엇인가. 왜 ‘집 없는 집주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공사장 막노동꾼으로 일하다 지난 2000년께부터 ‘노숙자의 길’로 들어섰다. 현재는 혈혈단신으로 서울 화곡동의 월세방에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억원대의 ‘재산가’가 노숙자 생활을 하며 월세방에 사는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경찰은 이에 대해 “실제론 박씨의 재산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서울 구로동 일대에서 활동하는 한 사채업자를 박씨 명의 부동산의 실제 소유자로 지목한다. 그 사채업자가 유사시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박씨 명의로 부동산을 매입했다는 것.
박씨가 현재 살고 있는 화곡동 월세방도 이 사채업자가 구해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채업자는 박씨 이외에도 또 다른 노숙자 3명에게도 월세방을 얻어줬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사채업자는 왜 노숙자들에게 월세방을 얻어준 것일까.
경찰은 ‘수사중’이라는 이유로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한 수사관계자는 “사채업자가 박씨를 비롯한 또 다른 노숙자 3명을 ‘악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박씨 등을 포함한 노숙자 4명의 명의로 주택 여러 채를 구입해 전세를 놓아 전세금을 받고, 또 은행으로부터도 담보대출을 받은 다음 잠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사기 행각에 박씨 등이 말려들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런데 박씨는 경찰에서 “주택 세 채는 모두 내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의 사채업자 또한 “그 집은 나와 무관하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의 진술만을 놓고 보면 주택 세 채는 ‘엄연히’ 노숙자 박씨의 소유인 셈이다.
경찰로서도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곤혹스러운 상태. 경찰은 박씨에게 주택 세 채 소유 과정에 대해 집중 추궁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경찰은 주택 문제와는 별도로 노숙자 박씨의 은행계좌에 입금된 수백만원은 실제 박씨의 돈으로 보고 있다. 박씨가 거리에서 구걸하거나 자신 명의로 차명 통장을 만들어주면서 모은 돈이라는 것.
실제로 박씨는 이번 ‘폭발물 협박사건’의 범인에게 통장을 만들어주면서 15만원을 받았던 것으로 계좌 추적 결과 드러났다. 박씨는 지난 10월9일 오후 서울 종묘 공원에서 이번 사건의 범인과 ‘우연히’ 만나 우리은행과 하나은행 통장 2개를 만들어줬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하지만 박씨의 진술은 그뒤 오락가락하고 있다. 경찰에서 처음 조사받을 때는 “내가 종묘공원에서 담배 피우고 있는데 그 사람(범인)이 먼저 다가와 ‘신용불량자라 통장을 만들 수 없다’며 ‘통장을 만들어주면 돈을 주겠다’고 말해 만들어줬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후 진술에선 “그 사람(범인)이 다른 노숙자와 얘기하는 것을 엿들었는데 잘 안된 것 같아서 내가 먼저 그 사람한테 다가갔다”고 번복했다는 것. 경찰은 이에 대해 “통장을 만들어준 시점이 폭발물 협박사건(12월5일)이 처음 터지기 두 달 전이기 때문에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게다가 박씨가 이번 사건의 범인말고도 여러 차례에 걸쳐 다른 ‘불특정 다수’에게 통장을 만들어주는 바람에 그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 통장에는 거의 매일 1천∼2천원씩 꼬박꼬박 입금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돈은 박씨가 거리에서 행인들에게 구걸해 모은 ‘재산’. 여기에 가끔은 7만∼8만원씩 입금된 경우도 있었다는 것. 이 ‘목돈’이 바로 차명 계좌를 만들어주면서 챙긴 ‘수수료’인 셈이다. 이렇게 해서 박씨가 모은 돈이 수백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노숙자 박씨는 수억원대의 ‘진짜 재산가’인가. 아니면 모종의 사기집단에게 이용당하는 일개 ‘하수인’에 불과한 것인가.
이에 대해선 현재 수사가 진행중이어서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노숙자 박씨’ 명의의 집 세 채와 통장에 입금된 돈은 ‘법적으로’ 엄연히 박씨의 소유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