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밴 기사와 고객으로 만난 여성을 2년 동안 괴 롭혀온 피의자 정씨. 그는 깊이 뉘우친다며 뒤 늦게 고개를 떨구었다. | ||
청주 동부경찰서는 지난 14일 운전기사 정홍근씨(가명•32)를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예식장 폐백음식을 만들어 배달하던 이현옥씨(가명•여•36)를 성폭행한 뒤 금품을 갈취했다는 것. 정씨는 특히 지난해 1월 이씨의 남편이 사망하자 사망보험금을 가로채는 것은 물론 이씨의 아홉 살 난 딸까지 성추행한 혐의도 받고 있다.
정씨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단란했던 이씨 가족은 이 낯선 ‘침입자’의 등장으로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났다.
지난 2001년 이씨는 당시 예식장 폐백음식을 만들어 배달하는 일로 꽤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이씨는 14년째 그 일을 하면서 청주 일대 예식장 대여섯 곳과 독점 계약을 맺을 만큼 나름대로 기반도 닦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씨는 운전면허가 없었던 탓에 시장에 가서 필요한 음식 재료를 살 때와 완성된 음식을 예식장에 배달할 때는 매번 콜밴을 이용해야 했다.
그해 4월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콜밴을 호출했다. 콜밴 기사 정씨를 만난 것은 그때였다. 밤새도록 음식 장만을 한 이씨는 새벽에 예식장으로 출발하기 위해 미리 예약해둔 정씨의 차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다행히 콜밴 회사에서 다른 차량을 보내줘 가까스로 예식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가 난 이씨는 정씨에게 전화를 걸어 경위를 따졌고, 이에 정씨는 사과의 의미로 술을 한잔 사겠다고 제의했다. 이씨는 정씨의 사과에 불쾌했던 마음이 다소 가라앉았다. ‘어차피 앞으로도 계속 거래할 업체 사람인데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게 이씨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씨는 정씨의 ‘술 한잔 하자’는 제안에도 응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두 사람은 청주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영암약수터 유원지 식당에서 술잔을 나눴다. 마침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던 탓에 어느덧 이씨는 평소 주량을 넘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이씨에게 정씨는 “집에 데려다 주겠다”며 자신의 차에 태웠다. 이씨는 몇 번 사양했지만 이내 ‘나보다 나이도 어린 데 별일이야 있겠나’ 싶은 생각에 그만 차에 오르고 말았다.
▲ 2년의 ‘악몽’을 견디다 못한 피해자 이씨는 아들의 담임 선생에게 메모를 전해 도움을 요청했다. | ||
하지만 여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점잖기만 했던 정씨는 이미 ‘어린 동생’이 아니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이씨에게 다짜고짜 덤벼들었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녀를 성폭행했다. 악몽같은 그날의 일은 그러나 불행의 시작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이때부터 수시로 이씨를 불러내 적게는 한 번에 30만원에서 많게는 9백만원까지 수십회에 걸쳐서 돈을 뜯어냈다는 것.
심지어 정씨는 “차를 사서 장사를 해보겠다”며 목돈을 갈취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이씨는 “말을 듣지 않으면 남편에게 연락하겠다”는 정씨의 협박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1월13일 이씨의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설날을 맞아 평소 술을 좋아하던 남편이 ‘석 잔이면 밥상머리를 끌어안고 쓰러진다’는 말이 있을 만큼 독한 알코올 60도의 ‘진도 홍주’를 연거푸 들이키다 쓰러지고 만 것. 남편은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지만 결국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때부터 정씨의 협박은 더욱 심해졌다. 아예 남편 행세를 하며 그녀의 통장이나 지갑, 휴대폰 등을 수시로 뒤지는 등 그녀의 모든 것을 감시했다. 이 과정에서 정씨는 이씨가 남편 사망으로 1억2천만원의 보험금을 탔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집요하게 그녀 곁을 맴돌았다.
이씨는 정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난해 8월에는 아이들을 여동생에게 맡긴 채 태국으로 잠시 피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정씨는 이씨의 여동생까지 괴롭혔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이씨에게 정씨는 한 술 더 떠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 것을 요구했다.
정씨는 “애들이 청주에서 곱게 학교 다니게 하려면 내 말대로 하라”라며 노골적으로 이씨 아이들을 협박의 볼모로 삼았다. 이씨의 몸과 돈을 노린 동거 생활이 순탄치 못했음은 당연했다. 정씨는 거의 매일 이씨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녀의 몸을 탐했고 돈을 요구했다. 그의 말을 거부하면 폭행과 협박이 돌아왔다.
기어코 정씨는 초등학교 2학년에 불과한 이씨의 딸 희선양(가명•9)까지 건드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어린 딸의 온몸을 쓰다듬으며 히죽히죽 웃을 때면 이씨는 몸서리쳐야 했다. 행여 어린 딸을 해코지 할 것이 두려웠던 이씨는 그저 정씨가 요구하는 대로 어떻게든 돈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이 과정에서 정씨에게 모두 1억3천여만원의 금품을 뜯겼다고 한다. ‘적과의 동침’이 끝난 것은 지난 2월10일. 날이 갈수록 이씨는 먼저 간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어린 딸마저 정씨에게 어떻게 될 것만 같은 두려움에 시달렸다. 이씨는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이날 정씨의 감시를 피해 화장실에서 조마조마하는 심정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메모를 써내려가기에 이르렀다. 이 메모는 이씨의 아들 성철군(가명•12)을 통해 담임선생님에게 전해졌다. 이씨의 긴 악몽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