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OJ심슨 사건’으로 불리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이 또다시 미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지난 95년 발생한 이 사건은 외과의사 이도행씨(41)가 자신의 집인 서울 은평구 불광1동 M아파트 거실에서 아내 최아무개씨(여·당시 31·치과의사)와 딸 이아무개양(당시 1)을 살해한 뒤 집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 었다. 당시 경찰은 평소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씨가 아내의 불륜사실 등을 알고서 격분한 끝에 아내와 딸을 살해했다며 이씨를 구속했다.
경찰은 또 이씨가 알리바이를 위해 숨진 아내와 딸의 옷을 벗겨 욕조에 유기하고, 오전 7시께 안방 장롱에 불을 지른 뒤 불이 천천히 옮겨붙도록 하는 ‘지연화재’를 시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고 발표했다.
살인 혐의를 쓴 이씨는 이때부터 무려 7년7개월간 긴 법정 투쟁을 벌여야 했다. 처음에는 절망적이었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것. 그러나 98년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데 이어, 같은 해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되는 반전을 거듭하다 2001년 2월 서울고법에서 다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의 판결이 유죄와 무죄를 거듭함에 따라 생사의 기로에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이씨가 자신에게 씌워졌던 살인누명을 완전히 벗게 된 것은 지난 2월26일. 이날 열린 재상고심에서 대법원 1부(주심 서성 대법관)가 마침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것.
그렇다면 이제 남는 의문은 하나다. 8년 전 이씨의 아내와 딸을 살해한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사건은 아직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자는 없다’.
‘이런 젠장, 연막탄(훈연식 바퀴벌레 구충제)을 터뜨렸으면 우리에게 연락이라도 빨리 해줘야 할 것 아니야….’
지난 95년 6월12일 오전 8시50분께 자신이 근무하던 서울 은평구 불광동 M아파트 7층에서 연막탄 연기가 솔솔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한 경비원 A씨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느릿느릿 7층으로 올라간 A씨에게 707호 주민이 연기 발생지점으로 바로 옆 집인 708호를 지목해줬다. 이를 확인한 A씨는 이내 경비실로 내려왔다. A씨가 한숨을 돌릴 무렵 이번에는 경비실 인터폰이 신경질적으로 울려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연막탄이 아니라 화재가 발생한 것 같다’는 신고였다.
화들짝 놀란 A씨는 황급히 소화기를 들고 708호로 진입했고, 이어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들이 합세했다.
▲ 지난 2000년 2월24일 벌어진 모의화재실험 장면. | ||
최씨 모녀는 목이 졸린 듯한 자국이 있는 상태로 물이 담긴 욕조에 떠있었다. 최씨가 입고 있던 흰색 반팔 티셔츠는 벗겨져 있었다. 그녀의 팬티는 무릎 근처까지 내려진 상태였고, 벗겨진 티셔츠와 최씨의 입술, 손톱 사이에서는 소량의 핏자국도 발견됐다.
조사 결과 화재는 안방 장롱 속 옷가지에서 처음 발화한 것으로 추정됐다. 최씨의 가방에 있던 현금과 수표 51만8천원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상이 경찰과 검찰의 조사자료에 기록된 당시 사건과 관련된 정황이었다.
수사를 맡은 경찰은 애초에 2명을 용의선상에 올렸다. 한 사람은 숨진 최씨와 한때 내연의 관계였던 인테리어업자 B씨였고, 또다른 용의자 한 사람이 바로 최씨의 남편 이도행씨였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일단 B씨는 알리바이를 댈 수 있었기에 용의선상에서 빠졌다. 사건 발생시점으로 추정되는 6월12일 새벽부터 아침까지 같은 회사 여직원의 아파트에 있었다는 것. 결국 남는 사람은 남편 이씨뿐이었고, 이때부터 경찰의 무리한 끼워맞추기식 수사가 진행되었다.
범행을 입증할 만한 지문이나 범행도구 같은 직접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경찰이 이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이유는 단 세 가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 결과 추정 사망시각은 이씨가 출근한 오전 7시 이전이라는 것.
또한 화재 발생 시기도 이씨의 출근시간인 오전 7시 이전이라는 화재전문가의 감정, 그리고 거짓말탐지기의 양성반응 등이었다. 검찰은 사건 발생 3개월 만인 지난 95년 9월2일 이씨를 구속했다.
이 과정에서 이씨의 변호인측은 사망 추정시간과 화재 발생 시간이 이씨가 출근한 7시 이후라는 점을 입증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지난 2000년 서울고법의 두 번째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측은 스위스의 저명 법의학자인 토마스 크롬페처 교수를 법정에 내세웠다. 크롬페처 교수는 법정에서 “시신이 뜨거운 물에 잠겨 있을 경우 강직현상이 일찍 올 수 있다”며 이씨측에 유리한 증언을 했다.
이 증언은 이씨가 출근한 오전 7시 이후에 최씨 모녀가 살해됐을 수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결국 크롬페처 교수의 증언은 대법원의 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번째 충돌지점은 이른바 ‘지연(遲延) 화재’에 대한 부분이었다. 검찰은 “이씨가 출근한 뒤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불이 서서히 붙는 밀폐된 공간인 장롱 속에 불을 놓았다”고 주장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검찰은 발화후 연기가 발견되기까지 1시간30분이 걸릴 수 있다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변호인측은 모의 화재실험을 통해 30여분 만에 시커먼 연기가 치솟는다는 점을 입증해 검찰의 ‘공격’을 무력화했다.
검찰이 마지막 쟁점으로 내세운 거짓말 탐지기 결과는 대법원에 의해 “거짓말탐지기 결과를 유죄의 증거로 볼 수 없다”며 인정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남편 이씨를 진범으로 확신했던 경찰과 검찰의 주장이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음으로써 결국 이 사건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을 처지에 놓였다. 이미 8년이나 지난 사건을 다시 재수사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
단순 강도나 또는 제3의 원한 관계 범행일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은 결국 오리무중으로 빠지고 마는 걸까.
지금 이 순간에도 진범은 경찰과 검찰 법원 모두를 비웃으며 어디선가 또 다른 완전범죄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