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조폭 관련 영화의 한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이 조직은 대수롭지 않은 토착 건달쯤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 10여 년간 이들이 저지른 범죄는 전형적인 ‘제4세대 조폭’의 전형이라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다. 예컨대 지금까지의 조폭이 보호비 갈취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면 이들은 합법적인 사업을 가장해 조직을 은폐해왔다.
물론 상황에 따라 대규모 조직원들이 나서는 세칭 조폭전쟁도 서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사건을 축소·은폐하기 위해 경찰 최고위급 간부에게 거액의 금품 로비를 펼치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최근 폭력조직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번 사건을 정밀 취재했다.
지난 89년 충남 아산시 도고면의 한 국도. 두 대의 승용차가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앞서 가던 승용차가 인적이 드문 논두렁 곁에서 멈춰섰다. 앞 차에서 내린 사내는 논두렁 사이로 무작정 달렸다. 그 뒤로는 흉기로 무장한 서너 명의 사내가 뒤쫓고 있었다. 이윽고 도망치던 사내는 뒤따라오던 사내들에게 덜미를 잡혔고, 결국 이들이 휘두르는 흉기에 잔혹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마치 조폭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 장면은 지난 89년 충남 아산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이었다. 당시 아산에는 그랜드파(당시 블루스카이파)와 태평양파라는 양대 폭력조직이 있었다. 좁은 지역에 두 조직이 이권을 다투다보니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이날 논두렁에서 살해된 이아무개씨는 당시 태평양파의 두목이었다. 그는 그랜드파 두목이던 박아무개씨와 시비를 벌이다가 수적으로 밀려 승용차로 도망치던 중 휘발유가 떨어졌던 것. 결국 그랜드파 조직원들의 추격을 피하지 못한 이씨는 도망가다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두 조직 사이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쟁이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 두 조직은 부두목급 간부가 모인 가운데 조직 통합에 대한 합의를 했다. 그러나 이질적인 두 집단이 지휘부의 말 한마디로 ‘형제’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후에도 두 조직의 조직원들은 사사건건 충돌했다.
▲ 경찰에 검거된 조직폭력배들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음. | ||
그러나 보복은 또다른 보복을 불렀다. 역시 같은 날 이번에는 그랜드파 조직원이 태평양파 조직원을 집단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태가 이쯤되자 ‘한 지붕 두 조직’ 간에는 대규모 전쟁이라도 벌어질 듯한 살벌한 분위기가 흘렀다.
위기의식을 느낀 두 조직의 중견 조직원들이 모여 다시 조직 통합에 대한 논의를 벌였고 마침내 지난 96년 10월 양 조직의 완전 통합을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1월 두 조직은 아산시 도고면 한 단란주점에서 조직원 30∼40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초의 통합 회식도 가졌다.
이런 가운데 두 조직의 단결을 공고히 해준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광주지역 조폭 국제PJ파와의 전쟁이었다. 두 조직이 통합한 이후 출범한 신그랜드파를 이끌던 두목 박씨의 지시에 따라 태평양파 출신 조직원과 그랜드파 출신 조직원 30여 명이 집단으로 상경, 국제PJ파 행동대장 이아무개씨 등에게 전치 14∼15주의 중상을 입히고 내려온 사건이었다.
또 지난 98년 10월에는 천안의 폭력조직 신미도파(현재 와해)와 대규모 전쟁을 벌여 이중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다. 사소한 시비 끝에 감정이 상한 두 조직의 조직원 수십 명이 아산의 모처에서 일대 패싸움을 벌인 것.
이날의 전쟁은 아산의 신그랜드파 세력을 가볍게 여겨 거침없이 아산으로 쳐들어온 신미도파의 참패로 끝났다. 게다가 신미도파는 이후 검찰에 포착돼 조직원 전원이 구속되기도 했다.
통합 이후에도 서로 으르렁거리던 두 조직은 이렇듯 외부 조직과 전쟁을 벌이면서 내부결속을 더욱 다졌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모르고 있던 아산경찰서는 지난해 1월 태평양파를 사실상 와해된 조직으로 판단했다. 매년 작성하는 관리대상 조직폭력배 현황에서 이 조직을 제외시킨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8월 천안지청 강력부는 관내 폭력조직에 대한 분석 작업 도중 태평양파가 와해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이들 조직에 대한 자료수집에 나선 검찰은 국제PJ파 습격사건과 천안 지역 폭력조직 신미도파와의 전쟁 등이 신그랜드파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게다가 이 조직은 경찰 고위층을 상대로 치밀한 로비를 벌여 그동안의 범죄를 은폐시켜왔다는 사실을 잇달아 밝혀내기에 이른다.
이번 사건의 주임검사인 이한선 검사는 “조직의 두목인 박씨의 경우 아산 내 대형 나이트클럽 두 곳을 직접 운영하는 등 건실한 사업가로 위장하면서 지역유지로 행세해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