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지난 5월20일 밤 10시쯤 술을 마신 상태에서 귀가해 가족에게 폭언을 하던 남편 조씨의 머리에 이불을 뒤집어 씌워 질식사시킨 혐의다. 또 조씨의 세 딸은 사건 당시 조씨의 팔·다리를 붙잡는 등 범행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사는 조영규씨. 아들 귀한 집안의 3대 독자였던 조씨는 지난 71년 지금의 부인 정씨와의 결혼에 성공했다. 경찰에 따르면 조씨는 생활능력과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 네 모녀가 가장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신림동 의 한 빌라. 사건의 본질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이런 조씨에게는 한 가지 묘한 버릇이 있었다. 술만 마시면 말이 많아진다는 것. 평소 음주를 즐기던 조씨는 술만 마시면 부인에게 험한 말을 예사로 퍼부었다고 한다. 아들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서러움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들과 인연이 없었던 것도 집안 내력이었는지 3대 독자였던 조씨는 부인과의 사이에서도 줄줄이 딸만 넷을 낳았을 따름이었다. 실제로 숨진 조씨의 딸들은 경찰조사에서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어머니가 서러움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갖은 서러움 속에서도 부인 정씨는 억척스런 생활력을 바탕으로 봉제공장과 가죽공장을 전전하며 딸 넷의 대학졸업을 책임졌다. 비록 고급 주택은 아니었지만 지금 살고 있는 1억3천만원짜리 ‘내 집’을 장만한 것도 순전히 자신과 딸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딸들이 어렸을 때는 그나마 조씨로 인한 갈등은 ‘부부간의 문제’에 불과했다. 그러나 딸들이 대학에 진학하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가족간의 갈등’으로 비화됐다.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리던 조씨의 주사로 인해 딸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던 것.
장성한 딸들의 눈에는 ‘생활능력도 없으면서 날마다 술에 취해 가족들에게 행패만 부리는’ 아버지와 살을 맞대고 사는 어머니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난동을 부릴 때마다 딸들은 ‘차라리 이혼을 하라’며 어머니를 부추겼다.
사건이 벌어진 지난 5월21일 새벽에도 상황은 비슷하게 전개됐다. 이날 아침 출근을 앞두고 식탁 앞에 앉은 조씨는 부인에게 ‘반찬이 이게 뭐냐’며 한 차례 잔소리를 늘어놓고 나갔다. 식탁에 앉아 있던 가족들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리고 이날 밤 어김없이 술에 취해 들어온 남편 조씨. 밤 10시에 들어온 조씨는 그 시간에 밥을 요구했고, 부인 정씨는 아무 말없이 밥상을 내왔다. 술에 취해 식탁 앞에 앉은 조씨의 심기가 또 틀어졌다. 반찬이 아침에 나온 것과 대동소이했던 것.
이때부터 문제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조씨의 트집잡기는 반찬에서 시작돼서 정씨의 살림 능력으로까지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조씨는 부인 정씨를 안방으로 불러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라”고 요구했다. 이쯤되자 각자의 방에 있던 딸들 가운데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이 나서 어머니를 감싸기 시작했다.
방을 이쪽저쪽 옮겨다니며 말다툼을 벌이던 이들 네 사람. 딸 세 명이 마침내 ‘갈라서라’는 말을 쏟아내자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가뜩이나 술기운이 올라 흥분된 상태였던 조씨는 “내가 이혼해주면 너희들이 잘 될 것 같냐”며 맞받아쳤다. 이 과정에서 조씨는 “너희들만 나가서 살면 그 집에 불을 질러 버리겠다”며 위협했다.
이런 식으로 네 시간이 넘게 진행되던 말다툼은 재떨이가 오가는 등 물리적인 충돌로 비화되자 파국으로 치달았다. 흥분한 조씨를 제지하기 위해 부인 정씨가 달려든 것. 물론 흥분한 것은 정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안방 침대에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고 정씨가 남편 조씨의 머리에 이불을 뒤집어 씌우게 됐다. 이렇게 되자 조씨는 더욱 거세게 팔·다리로 부인을 때리기 시작했다. 딸들 가운데 첫째와 셋째가 달려들어 아버지의 팔과 다리를 붙잡았다.
이를 지켜보던 둘째 딸의 눈에 ‘저러다가 아버지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어머니 정씨의 손은 남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술주정 부리던 가장 조씨는 이렇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건 발생 직후 유가족들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부인과 세 딸을 검거했다. 경찰에서 부인 정씨는 “남편을 죽인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뒤 “다만 나로 인해 딸들까지 범행에 연루돼 가슴 아플 뿐”이라고 심경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