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에 따르면 이 남자는 전·현직 여교사와 간호사 등을 상대로 중소기업체 사장인 것처럼 행세하며 성관계를 맺는 한편 수천만원의 금품을 뜯어온 혐의다. 현재까지 드러난 피해여성은 모두 7명.
도저히 눈뜨고 보지 못할 중년 카사노바의 엽기적 행각에 신이 벌을 내린 것이었을까. 피의자는 자신의 적나라한 행각이 담긴 이메일이 피해여성에게 전달되는 바람에 카사노바 행각을 그만둬야 했다.
서울 양천구 목동에 사는 전직 여교사 이순임씨(가명·42). 5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두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던 이씨는 최근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윤영환씨(가명·45)와 새출발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씨가 윤씨를 만난 것은 지난 3월이었다. 재혼을 전문으로 알선해주는 인터넷 중매업체에서 메일을 주고받으며 얼굴을 익힌 두 사람은 만난 지 일주일 만에 몸을 섞었다.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했다. 다만 서로를 깊이 알기 위한 시간이 부족했다는 사실, 그것이 유일한 복선이었을 따름이었다.
지난 4월19일, 토요일이었던 그 날도 이씨는 은근히 밀려오는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순임씨는 윤씨와 1박2일간의 짜릿한 데이트를 즐긴 터였다. 헤어진 그 몇 시간이 애틋해 또다시 윤씨와 통화를 하고 있던 그 순간, 컴퓨터가 새 이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수화기를 든 채 윤씨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있던 순임씨는 별 생각없이 이메일을 클릭했다. 메일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4월12일 오후 4시 비행기로 서울에 갔다. 토요일 퇴근 시간이 이토록 길게 느껴진 날은 없었다.’
‘제니’(가명)라는 여성이 한 남자에게 보낸 메일은 이 여성이 지난 4월12일 한 남자와 함께 했던 시간을 일기 형식을 빌어 꼼꼼히 기록해 둔 것이었다. 이메일을 읽어나가던 순임씨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장문의 메일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와 식사를 마치고 우린 자동차극장에 갔다. 7시30분 영화와 10시20분 것이 있었다. 10시20분 영화표밖에 없어 우린 우선 지낼 곳을 정해야 했다. 그 이가 안내하는 곳으로 우리는 함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고,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야, 우리 부부지. 이런 곳에서 어색해 하거나 눈치볼 필요가 없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지?” 물론 그랬다. 우리가 누구의 눈치를 보겠는가?
▲ 여러 여성들을 상대로 한 피의자 윤씨의 다중 엽색행각이 들통난 계기가 된 문제의 이메일. | ||
전체적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메일이었지만 그 내용만은 실로 적나라한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메일 앞머리 수신인란에 또렷이 적힌 아이디. 그 주인공이 다름아닌 윤씨 아닌가.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자신과 사랑을 속삭이고 미래를 약속했던 윤씨, 바로 그였던 것이었다.
가슴이 내려앉는 충격을 받은 순임씨는 순간 수화기가 손에서 떨이지는 사실도 까맣게 잊었다. 순임씨는 그때부터 전전긍긍의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결심 끝에 이씨는 윤씨에게 메일을 보내 사태의 경위에 대해 따져 물었다. 이윽고 윤씨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순임에게! 저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해명할 수도 없네요. ○○○라는 분하고 여러 차례 메일을 주고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사랑하는 여인은 이순임 당신이 맞습니다.”
윤씨의 구구한 변명이 담긴 메일을 받은 이씨는 순간 잠시 혼란에 빠졌다. 메일의 마지막에서 윤씨는 ‘4월12일 그 날 나는 시골 아버지에게 다녀왔다. 설마 내가 아버지까지 팔겠는가’라며 눈물겨운 변명을 늘어놓았다.
반신반의하던 순임씨는 수소문 끝에 그의 전 부인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부인이 밝힌 내용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결혼 생활중에도 끊임없이 여자 문제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했고 결국 그 문제로 인해 이혼했음을, 윤씨의 전 부인은 담담히 털어놨다.
한편으로는 문제의 메일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제니’에게 도움을 요청해 윤씨의 엽색행각을 입증할 수 있는 메일을 확보했다. 윤씨의 실체에 대해 낱낱이 파악한 순임씨는 결심했다.
윤씨와 지내는 동안 사업자금 명목으로 빌려준 1천4백만원의 돈도 돈이었지만 그보다 자신의 사랑을 그런 식으로 배신한 그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의 조사결과 윤씨의 행각이 속속 드러났다. 고급 승용차를 몰며 건실한 중소기업체 사장인 것처럼 행세했지만 사실 회사는 이름뿐이었다. 게다가 윤씨가 살고 있는 아파트조차 채권 가압류로 인해 재산가치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정작 따로 있었다. 문제의 이메일에 등장하는 울산의 ‘제니’ 이외에도, 천안의 이 아무개 여교사, 분당의 최 아무개 간호사 등 자신과 똑같은 방법으로 유린당한 피해여성이 수두룩하다는 것.
그동안 자신을 만나면서도 윤씨가 지방으로 출장을 다니는 일이 유난히 많았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이를테면 ‘울산으로 출장간다’며 울산의 현직 여교사를 만나고 ‘천안으로 출장간다’며 천안의 여교사를 만나는 식이었던 것.
결국 중년의 나이에 전국을 오가며 화려한 카사노바 행각을 벌이던 윤씨는 경찰에서 혼인빙자간음 및 사기 혐의로 지난달 31일 구속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