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여당과 정부의 ‘무기력’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라는 분석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30%대에서 답보상태인 대통령 직무수행 만족도, 갈수록 한나라당과 격차가 커져가는 열린우리당 지지율 등 여권이 좀처럼 침체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당정의 ‘무기력’에 대한 노 대통령의 불만이 폭발 일보 직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 잇달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신행정수도 건설, 국가보안법 폐지와 과거사 규명을 포함한 개혁입법 등 판은 잔뜩 벌여 놨지만 당정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비롯된 결과다.
6·30 개각을 계기로 ‘분권형 국정운영’을 내걸고 정국 현안에서 가급적 한발 물러 서 있으려던 노 대통령으로선 갑갑하기 이를 데 없는 처지가 됐다. 한 측근은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지금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처지”라고 설명했다. “무사안일에 찌든 정부 고위 공직자들과 무엇 하나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여당의 행태에 대한 대통령의 불신과 실망이 임계점에 이른 것 같다”는 해석도 더해진다.
우선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 대통령의 시각은 “별반 기대할 것도, 하지도 않는다”로 요약될 듯 하다. 노 대통령이 지난 9일 청와대에서 이부영 의장, 천정배 원내대표와 가진 만찬에서 “걱정이 많았었는데 당이 아주 빠르게 안정되고 자리를 잡는 것 같아 보기가 좋다”고 했지만 청와대의 사정에 밝은 여권 인사들은 “대통령의 진심은 아마 정반대일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에 갖는 불만은 당이 주요 현안을 놓고 우왕좌왕하며 개혁입법 등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집중되고 있다는 평가다. 과거사 규명과 국가보안법 폐지 등에 대해 당내에서 찬반 논란만 벌일 뿐 결론을 도출하지 못해 결국은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라 하겠다.
8·15 경축사에서 과거사 규명의 필요성을 직접 언급한 것이나 9월5일 MBC 대담을 통해 “국민이 주인이 되는 국민주권시대, 인권존중의 시대로 간다고 하면 (독재시대에 있던) 낡은 유물인 국가보안법을 폐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밝힌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 지난 9일 노 대통령은 이부영 의장과 천정배 대표를 만났다. | ||
문제는 노 대통령도 이 같은 위험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달리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 열린우리당 친노 그룹의 한 초선 의원은 “집권 2기를 맞아 노 대통령이 국정운영의 화두로 던진 것은 ‘분권’과 ‘당 중심’이다. 이해찬 총리와 정동영 통일,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등 당내 유력 중진들을 내각에 포진시키고 사실상의 책임총리제를 도입하거나 내각을 분야별 팀 체제 바꾼 것도 이같은 취지에서다. 그러나 구상과 달리 열린우리당의 사정은 리더십 결여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노 대통령의 판단이다. 여당을 앞세워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대통령 자신은 국정 핵심과제에만 전념하려던 의도와 달리 현안마다 대통령이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야 당이 움직이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 노 대통령은 자신이 ‘국보법 폐지’를 천명한 후 개정이냐 폐지냐로 나눠졌던 열린우리당 의견이 급속히 폐지로 모아지는 것을 보고 “한심하다”는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기국회가 문을 연 이후에도 국보법 처리 방향에 대해 이렇다할 결론을 도출해내지 못한 것도 비판받을 일이지만, 자신이 한마디 했다고 금세 교통정리가 되는 상황은 더욱 더 문제라는 시각이라 하겠다. 특히 노 대통령이 일관되게 강조해온 ‘당정 분리’ 원칙을 결과적으로 본인이 훼손시키는 상황이 초래된데 대해 못마땅해 하고 있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 대통령의 불만은 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적 평가에서도 드러난다. 이부영 의장과는 원래부터 껄끄러운 관계였던데다 당내 기반이 거의 없어 조정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점에 비판적이며, 천정배 원내대표와는 ‘김혁규 총리’ 지명 논란 이후 의도적이다 싶을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다. 실제 국보법 개폐에 대한 당내 이견을 절충하면서 입지를 강화하려던 천 대표는 돌연한 노 대통령의 폐지 발언을 접하고 적지않게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노 대통령과 천 대표의 ‘금이 간’ 관계가 우려할 만한 단계로 나빠진 것 아니냐는 얘기가 열린우리당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여권 내에선 ‘청와대 파견 총독’이란 당내 일각의 비판까지 들으며 노 대통령의 메신저 역할을 해 왔던 문희상 의원이 최근 현안에 대해 입을 닫고 있는 것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도부가 알아서 하라”는 노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가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도 있다. 열린우리당 내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제를 부활시켜 당청간 의사소통을 원활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노 대통령이 꿈쩍도 안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여권 내에선 현안에 대한 노 대통령의 교통정리가 고위공직자 비리조사처(고비처)에 대한 기소권 부여 논란에까지 이어지는 것 아닌가라는 걱정스런 전망이 나오고 있다. 당정이 첨예한 이견을 보이며 결론없이 표류하고 있는 고비처 문제 역시 결국은 노 대통령이 나서 정리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한나라당이 강력 반발하고 있는 고비처 문제마저 노 대통령이 전면에 나설 경우 부정적 파장이 상당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친노 그룹의 한 의원은 “자생력이 부족한 지금의 당내 사정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대통령이 현안 정리에 나서는 상황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내년 1~2월 전당대회에서 당내 세력관계가 새로 정립되고 새 지도부가 선출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을 것이란 예상이다. 문제는 정쟁성 현안에 대통령의 개입이 계속될 경우 이미 바닥권인 국정 지지도가 더 내려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고 말했다.
▲ 지난 16일 국정과제 회의를 주재하는 노무현 대통령. | ||
“공직사회의 혁신이 여전히 더디고 답답하다”(9월4일, 차관-외청장 혁신토론회)고 하소연하고 “(대통령을) 1년반 동안 하면서 보니 공무원들이 하던 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 공무원들의 자세와 각오를 다잡는 일에 앞으로 대통령이 직접 나서겠다”(8월21일 장-차관 정책사례분석 토론회)고 윽박질러도 고위 공직자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권 내에선 노 대통령이 9월15일 산하 공기업 간부로부터 1백만원을 받았다 총리실 합동단속반에 적발된 김주수 전 농림부 차관의 사표를 수리한 것을 정부 고위 공직자에 대한 누적된 불만의 표출로 해석하고 있다. 건네진 돈의 액수가 이제까지의 기준으로 보면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관료의 정점인 차관을 가차없이 내친 것은 그야말로 ‘충격’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권 한 핵심 관계자는 “김 전 차관 경질에 담긴 대통령의 메시지는 고위 공직자들이 제대로 복무기강을 유지하지 않거나 사소하더라도 부적절한 처신을 할 경우 개혁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대하겠다는 것이다. 말로 일일이 표현은 않고 있지만 노 대통령은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중인 신행정수도 건설 등에 상당수 고위 공직자들이 ‘남의 일’인양 여기고 있는데 대해 무척 불만을 갖고 있다. 이해찬 총리나 정동영 통일, 김근태 보건복지,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 등 정치인 출신 장관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후한 평점을 받고 있지만 관료 출신 장차관들은 상당수가 낙제점을 겨우 웃도는 수준이다”고 밝혔다.
최근 지방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노 대통령을 만났다는 열린우리당 한 의원도 “대통령이 일부 고위 공직자들의 무사안일을 거론하며 ‘공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저런 식으로 일해도 되는지 회의가 든다’고 말해 깜짝 놀랐다. 앞으로 공직사회 전반에 혁신을 내세워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 것이란 느낌을 받았으며 김 전 농림부 차관 사표 수리 소식을 듣고 선 ‘이미 시작됐구나’란 생각을 갖게 됐다”고 덧붙였다.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노 대통령의 불만은 적지않은 수가 신행정수도 건설 문제에서 강력 반발하고 있는 기득권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평가에서도 드러난다.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서울에서 매일 서울의 이익을 생각하는 강남 사람과 아침, 점심 먹고 차 마시면서 나온 정책이 분권적 균형발전 정책이 될 수 없다”(8월20일 강원지역 혁신발전 5개년 계획)는 발언도 서울 강남권에 집이 있는 상당수 장차관 등 고위 공직자들에게 개인적 이해에 함몰되어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메시지란 해석도 나온다.
여권 내에선 고위 공직자들을 겨냥한 노 대통령의 개혁 드라이브가 ‘반(反)부패’와 함께 현 정권과 코드를 맞추려 하지 않는 인사들을 ‘솎아 내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비처 신설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한편으로 ‘찔끔 개편’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국면 전환 효과와 관계없이 언제든지 장·차관을 교체할 수 있다는 인사원칙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란 분석이다. 아울러 정치인 출신 장차관에 대한 노 대통령의 호의적 평가를 토대로 향후 열린우리당 인사들의 정부 고위직 진출이 늘어날 것이란 관측이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