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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9월21일 박근혜 대표가 옥인동 이회창 전 총재 자택을 방문했다. 이날 박 대표는 이 전 총재한테 국보법과 관련 ‘강도높은 훈계’를 받았다. 국회사진기자단 | ||
그러나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9월22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박 대표는 침통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 지도부가 준비한 수도이전 문제의 당론 도출이 무산됐고 국보법 관련 언급에 대해 박 대표는 거듭 양해를 구하며 의원들 앞에서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의원총회에 참석한 일부 인사들은 귓속말로 “이회창 위력이 아직 세긴 세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이회창 전 총재가 박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내뱉은 국보법 관련 발언이 결국 박 대표를 이 같은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관측인 셈이다.
의원총회 하루 전날인 지난 9월21일 박 대표는 서울 옥인동 이 전 총재 자택을 방문했다. ‘원로들을 찾아 뵙고 정국 운영에 관한 고견을 듣는다’는 취지에서 성사된 회동이었다. 박 대표측이 먼저 이 전 총재측에 만남을 제의했으며 이 전 총재측이 선뜻 수락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 대표가 옥인동을 방문하기 전 당내 인사들은 “서로 덕담이나 주고받을 것”이라며 별다른 정치적 해석을 하려 하지 않았다. 회동 성사 과정에 대해 박 대표의 한 측근인사는 “명절 인사식으로 찾아가 서로 손잡고 사진 한 장 찍는 거다. 비주류 끌어안기 차원의 홍보성 이벤트인 측면도 있지만 큰 정치적 의미는 부여하지 말라”고 밝혔다.
이 회동에 대해 이 전 총재 최측근인 유승민 의원은 전화 통화에서 “기자들이 몰려가 취재경쟁이 벌어지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시는 이 전 총재가 곤란해질 수도 있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옥인동 회동에서 박 대표측은 물론 이 전 총재 측근들마저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전 총재는 한나라당의 국가보안법 문제 처리과정과 관련해서 박 대표에게 ‘강도 높은’ 훈계를 하는 듯한 말을 건넨 것이다.
이날 이 전 총재는 “당에서 잘 대처하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국민들은 한나라당이 좀 더 분명하게 결단력 있게 대처해서 국민을 안심시켜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라며 일단 질책성의 발언을 한 뒤 “박 대표가 모든 걸 걸고 막겠다는 말씀을 했다. … 박 대표 개인이 책임질 문제를 넘어서 보다 큰 문제이기에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 1백21명 전원이 안 되면 의원직 사퇴하고 국회를 떠난다는 결연한 의지와 각오를 국민에게 보이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내부에선 이 전 총재의 ‘좀 더 결단력 있게 대처해서 국민을 안심시키라’는 당부나 ‘박 대표 개인이 책임질 문제를 넘어서…’ 같은 발언이 결국 박 대표의 지도력을 ‘평가절하’한 표현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나라당 의원 전원 사퇴’를 언급한 것도 박 대표가 옥인동 방문 직전 ‘국보법 명칭 변경 및 정부 참칭 조항 삭제 가능성’을 언급한 것을 질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 전 총재 발언 이후 한나라당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이 전 총재의 국보법 사수 의지에 대한 보수 논객들의 적극 찬성 여론과 함께 박 대표의 국보법 처리 방식을 심하게 질타하는 글들이 제법 올라왔다. 한나라당의 한 비주류 인사는 “이 전 총재의 이번 발언은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과 여권의 국보법 폐지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국보법 사수 강경노선에 나서주길 바라는 보수세력의 열망에 불을 지펴준 것”이라 분석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다음날인 9월22일 의원총회로 이어졌다. 박 대표는 당내 보수세력의 성토 분위기를 감지한 듯 의원총회 인사말에서 “최근 제 발언에 대해 우려가 있는데 지난 9일 기자회견에서 ‘국보법 폐지에 반대하고 개정은 논의해 볼 수 있다’고 밝힌 것에서 한가지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이 전향적으로 나서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던 ‘국보법 명칭 변경 및 정부 참칭 조항 삭제 가능성’ 언급을 아예 없던 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당내 보수세력과 비주류의 성토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당지도부가 수도이전 반대 대안으로 행정부서 지방이전을 통한 지방분권화를 이날 당론으로 도출하려 했지만 무산된 것이다. 당 지도부의 목소리가 하나도 먹히지 않는 자리였던 셈이다.
이날 의원총회 이후 당내 다수 인사들은 “이 전 총재의 발언이 박 대표의 지도력을 뿌리채 흔들어버렸다”면서도 “정치를 떠난 이 전 총재가 박 대표에게 덕담이나 해줄 것으로 알았는데…”라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정치적 파장을 낳을 수 있는 발언의 배경에 뭔가 있다는 추측도 뒤따랐다. 한나라당의 한 비주류 의원은 “이 전 총재 측근들이 아직도 대선자금 문제로 수감중인데 그들을 위해 박 대표가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 박 대표에게 서운함을 갖고 있는 이 전 총재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직도 한나라당을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관측했다.
비주류 성향의 다른 의원은 “이번 이 전 총재 발언 파장을 통해 박 대표가 한나라당을 사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이를 둘러싼 또다른 관측도 제기된다. 정치권 흐름에 밝은 한나라당의 한 3선 의원은 “이 전 총재는 두 번의 대선에서 전체 유권자 절반에 가까운 지지를 얻고도 낙선했다. 그런 만큼 지지자들에 대한 부채의식도 대단할 것이다. 이 전 총재는 앞으로 국민들을 위해 뭘 할 수 있는가에 늘 고민할 것이다. 이 전 총재 자신이 지닌 정치적 자산을 토대로 안정을 바라는 보수세력을 대변할 유력 차기 주자에 대한 지지와 후원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이번 옥인동 회동에서 보여준 이 전 총재의 언행은 최소한 이 전 총재가 염두에 둔 차기 주자군에 박 대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 아니겠나”란 조심스런 관측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 전 총재 측근인 이종구 전 언론특보는 “이 전 총재는 사회적 화두가 된 국보법 처리 문제에 대한 평소 자신의 소신을 밝힌 것일 뿐”이라며 “박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고견을 들려준 것인데 그것이 박 대표를 위축시키려 했다는 것은 억측이다”고 밝혔다. 이 전 특보는 “박 대표와 만났던 날 시종일관 두 분 모두 유쾌하게 대화를 나눴다. 이 전 총재가 이미 정치를 떠난 분인 만큼 쓸데없는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