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서갑원 이광재 백원우(왼쪽부터) 의원 등 노 대통령 측근그룹이 ‘실용주의’를 표방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 ||
그동안 ‘당권파 대(對) 비당권파’간 대립 속에서 중립을 유지하며 세력간 ‘균형추’의 역할을 자임해 온 이들이 최근 ‘개혁 대 실용’으로 재편되는 새로운 당내 역학구도에서 후자쪽으로 급격히 쏠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출범 후 청와대나 정부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과 시니어-386세대 측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친노그룹의 이 같은 움직임은 당장 ‘노심(盧心)’과 내년 1~2월 전당대회 당권 경쟁과 관련해 갖가지 추측을 낳고 있는 상황이다.
친노그룹의 최근 동향과 관련해 당내외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지점은 이광재 서갑원 백원우 의원 등 친노 386그룹들의 행보다. 이들은 이화영 김태년 이상민 윤호중 김종률 조정식 한병도 김재윤 의원 등과 함께 8월18일 의정연구센터를 발족시킨 이후 당내 실용주의 그룹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발족식에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초청해 강연 겸 간담회를 가진 바 있는 의정연구센터는 당론과 다르게 현 정권 재벌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총액출자제한제의 완화를 주장해 적지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또 삼성경제연구소와의 공동 세미나 개최(9월13일), 강신호 회장 등 전경련 회장단과의 만찬 회동(9월15일) 등을 통해 재계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행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앞으로 LG, SK 등 재벌그룹과도 개별접촉을 가질 예정이다.
이들은 일련의 활동을 통해 “좌우라는 과거 잣대로 우리를 보지말라. 중국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처럼, 우리는 시장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들이다”이라며 자신들을 ‘반(反) 시장적 좌파’로 보는 재계 일각의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 주력하고 있다.
아울러 의정연구센터의 활동 배경에 대해 “경제문제에 대한 노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을 잘 알기 때문에 측근들인 우리가 나서는 것”(이광재 의원)이라는 설명과 함께 “경제 살리기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찾기 위해 기업인들과 회동을 계속 가질 것”(이화영 의원)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친노 386들의 이 같은 행보를 바라보는 당내외 시각이 그리 곱지는 않다. 특히 비슷한 연배의 학생운동권 출신 의원들을 포함한 당내 개혁그룹들은 이들이 국가보안법 개폐나 친일진상규명법 등 과거사 규명엔 소극적 태도를 보이면서 재계와의 접촉에 열을 올리는 데 대해 비판적이다. 한 386 의원은 “노 대통령이 진두지휘하고 있는 개혁작업에 친노 386들이 주축을 형성하지는 못할 망정 방관자처럼 행동하는 것은 한마디로 실망스럽다.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념의 시대는 갔다’는 식으로 개혁 드라이브를 폄하하거나 자신들만 경제와 민생을 걱정하는 듯 행세하는데 대해선 정서적인 반감까지 갖게 된다”고 말했다.
재벌들에 대한 거부감이 뿌리 깊은 일부 의원들은 친노 386과 재계의 교류를 보다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재야 출신 한 재선 의원은 “누구라고 구체적으로 거명하지는 않겠지만 노 대통령의 측근을 자처하는 일부 의원들은 개인적 이해나 지역구 사정 등을 고려해 재계와의 연결고리를 만들려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당내에서는 이들이 국회 상임위도 재계와 연관성이 높은 곳을 ‘골라서’ 갔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들이 ‘실용 노선’을 내세우는데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정부나 재계의 유력 인사들이 의정연구센터 멤버들의 초청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대통령 측근으로 행세하기 때문 아니냐. 신종 ‘정경유착’이라 해도 결코 심한 얘기가 아니라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 김진표 의원 | ||
그러나 친노 386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지금의 스탠스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광재 의원은 “경제가 어려우면 직접적으로 고통받는 것은 생활이 어려운 서민과 자금력이 약한 중소기업들이겠지만 가장 마음 아파할 사람은 바로 노 대통령이다. 일부에선 과거사 진상규명과 경제살리기, 국가보안법 폐지 등 개혁입법 처리가 동시에 진행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사고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는 혁신이 필요하다. 과거사 규명과 경제 살리기 중 하나만 하는 것은 ‘보스형 정치’의 유산이며 지금은 국가보안법 폐지문제 등을 질서있게 논의하면서 경제살리기도 병행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이른바 ‘윈도(Window)형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원우 의원도 “무엇이 국익인지, 무엇이 국민적 합의에 부합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며 정책에 접근하는 방법론에서 우리는 실용주의를 선택하고 있다”고 가세했다. 특히 백 의원은 노 대통령이 개혁 드라이브를 앞장 서 지휘하는 것과 친노 386의 행보가 ‘엇박자’를 그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통령이 무서워서 할 말을 제대로 못한다면 친노 그룹이 아니다. 친노 그룹이란 오히려 대통령에게 할 말을 제대로 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386 의원을 포함한 친노 그룹이 실용주의 그룹 확대를 주도하려는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10월2일 공식발족할 예정인 일토삼목회(一土三木會)가 대표적인 사례다. 일토삼목회는 정부 장·차관 출신과 청와대 근무경험자나 시장, 군수 등 지방자치단체장을 지낸 인사들을 망라한 조직으로 열린우리당내 대상만 43명에 달한다.
일토삼목회의 결성에는 유인태 의원(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이광재 서갑원 백원우 의원 등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으며 노무현 정권 초대 경제 부총리를 지낸 김진표 의원이 대표를 맡을 예정이다. 또 노 대통령의 메신저로 불리며 내년 1~2월 전당대회 당권경쟁에 나설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는 문희상 의원(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주요 역할을 맡을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여권 내에선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을 축으로 한 당권파가 쇠락하면서 생긴 ‘권력 공백’을 친노그룹을 중심으로 실용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는 일토삼목회가 메우려 할 것이란 분석이 적지 않다. 앞서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에서 개정론을 주도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9월23일 결성된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안개모)과 친노 성향이 강한 영남그룹 주축의 ‘기업하기 좋은 환경만들기 포럼’, 친노 386 중심의 의정연구센터 등이 차기 전대에서 공동전선을 형성해 재야파-개혁당 그룹에 맞설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개혁당 출신 한 초선 의원은 “최근의 당내 상황을 보면 친노 그룹이란 기존의 분류는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다. 친노 그룹이란 개념이 본래 정책-노선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정기국회 개혁입법의 내용을 놓고 당내 각 세력이 ‘개혁 대 실용’ 구도로 분화되는 양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며 어느 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느냐에 따라 차기 전대 당권의 향배가 좌우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또 열린우리당내 권력지형과 관련해 “개혁그룹과 실용그룹의 주도권 다툼에서 결정적 관건은 역시 노 대통령의 의중이다. 그런 측면에서 ‘디바이드 앤 룰(분할통치)’을 통한 노 대통령의 당 장악력은 훨씬 더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친노 386들은 자신들의 실용주의 행보가 ‘노심’의 반영이라 주장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원칙을 중시하는 대통령의 스타일상 개혁 지향성은 결코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