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련 없음. | ||
한 20대 여성이 자살했다. 서울 한남동의 한 원룸에서 김아무개씨(29)는 넥타이로 자신의 목을 매 숨졌다. 그녀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지난 18일. 그러나 경찰 추정 결과 그녀는 이미 한 달 전에 죽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 달 동안 김씨의 싸늘한 시신은 10평 내외의 좁은 방안에 내버려져 있었다. 누구도 그녀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시신은 밀린 월세를 받기 위해 찾아온 원룸 주인에 의해 발견됐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1년 전까지 용산 일대 유흥업소에서 이른바 ‘나가요 걸’로 일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직 꽃다운 나이인 김씨는 왜 쓸쓸히 자살한 것일까.
경찰은 처음 이 사건 수사에 나섰을 때 김씨가 경제적인 문제로 자살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경찰은 김씨의 방에서 몇 개의 메모 쪽지를 발견하면서 자살동기가 경제문제 때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손바닥 크기의 메모지에 깨알처럼 쓰인 내용은 ‘남자는 다 똑같다’ ‘그 사람도 똑같다’ ‘그 사람이 나를 귀찮게 생각한다’ 등이었다.
그제서야 경찰은 그녀의 자살동기가 남자관계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경찰이 밝혀낸 그녀의 사연은 이랬다.
김씨의 고향은 목포.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한 것은 지난 99년. IMF로 고향에서 더 이상 지내기가 어려워 돈벌이를 위해 서울로 올라온 것이었다. 서울에 온 그녀는 용산 일대의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나갔다. 약간의 돈을 마련한 그녀는 5년 전부터 한남동 원룸에서 생활해왔다. 원룸의 보증금은 7백만원. 그녀는 낮에는 집에서 자고 밤에는 유흥업소에서 일했다.
용산의 한 단란주점에서 일하던 그녀는 2002년 11월 한 남자를 만나게 됐다. 손님으로 온 A씨(40)와의 만남이었다. A씨는 처음부터 매너가 좋았다. 거칠고 힘든 화류계 생활에 지친 그녀는 금방 그에게 빠졌다. A씨 또한 화류계의 여성답지 않게 참하고 순진한 김씨에게 끌렸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와 A씨는 술집 여종업원과 손님으로 만났지만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 업소 밖에서 자주 만나 데이트를 했었다고 한다. 함께 있는 시간이 계속되면서 A씨는 김씨에게 “네가 술집에서 일하는 게 너무 아깝다. 남들처럼 평범한 일을 해봐라. 내가 도와주겠다”고 설득했다. 김씨는 다른 남자와 달리 자신을 아껴주는 A씨의 말에 그대로 순응했다.
김씨는 2003년 3월 술집 종업원 생활을 청산했다. A씨도 김씨가 새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둘은 연인사이로 발전했고 A씨가 김씨의 집에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찾아가는 등 ‘준동거’ 관계로까지 진전됐다.
그러나 나이도 많고 별 다른 기술도 없던 김씨가 새 직장을 구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녀는 A씨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거짓으로 취직한 것처럼 꾸며대기도 했다. 김씨는 생활비가 떨어져 돈이 필요했지만 A씨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랑은 시간이 가면서 변하는 걸까.
김씨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 김씨에 대한 A씨의 감정은 서서히 식어갔다. A씨는 김씨의 집에 놀러와도 방에서 TV를 보거나 혼자 PC게임을 하다가 슬그머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버리곤 했다.
김씨는 미혼인 A씨를 결혼상대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A씨는 그렇지 않았다.
김씨의 수첩에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데 그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적힌 내용은 바로 그런 상황을 그대로 전해주는 부분이다.
A씨는 경찰에서 “김씨를 결혼 상대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둘 사이가 시들해지자 A씨는 김씨와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내 A씨는 지난 3월8일 김씨 집에 있던 자기의 짐을 모두 싸 집을 나섰다. 물론 이때도 A씨는 김씨와 상의도 없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A씨는 “헤어지자고 말하면 김씨가 나에게 더 매달릴 것 같아 말없이 김씨의 집을 나왔다”고 경찰에서 말했다.
김씨는 자신의 집에서 나간 A씨에게 연락을 해 보았지만 A씨는 의도적으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찰은 “김씨는 객지 생활에서의 외로움을 A씨에게 많이 의지했다. A씨가 떠나자 절망감을 느낀 김씨는 며칠 후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씨의 수첩에는 ‘그 사람이 나를 귀찮게 생각한다. 그의 곁을 떠나줘야겠다’라는 내용의 메모가 여러 군데서 발견됐다. A씨가 떠난 뒤 김씨는 극단적인 결심을 한 것으로 추정케 하는 부분이다.
김씨가 자살한 후에도 김씨의 시체는 한 달 동안 방치되었다. 김씨는 평소 가족과의 교류도 없었고 오랜 객지 생활에 친구도 없었다.
김씨가 숨진 뒤 한 달이 지나서야 집주인 방아무개씨(37)에 의해 그녀의 시신은 발견됐다.
방씨는 “집세가 밀려 독촉전화를 여러 번 했는데도 한 달 동안 받지 않아 보조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김씨가 방문 모서리에 넥타이로 목을 맨 채 숨져 있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김씨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듣고 경찰서로 온 A씨는 울먹이며 “나 때문에 김씨가 죽었다”며 때늦은 후회를 했다.
경찰 관계자는 “죽고난 뒤 후회하면 뭐하나. 살아있을 때 잘해 줘야지”라며 혀를 찼다.
이 사건을 담당한 수사관은 “유흥업소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일하다가 뒤늦게 사랑에 눈을 떠 평범한 여성으로 살려고 한 김씨였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