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블 딥’에 빠진 여권이 곧 대대적인 ‘반등’ 공세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다. 사진은 지난 1일 계룡대에서 열린 국군의 날 기념식에 참석, 열병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호전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남북-대미관계, 개혁과제를 둘러싼 정치권 갈등 등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수행 만족도와 열린우리당의 정당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진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여권내 상황인식의 산물이다.
그 중심엔 참여정부 집권 3년차를 맞는 2005년에 반전의 계기를 확실히 마련하지 못할 경우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대선 승리가 무망하며 그 결과 그동안 구축해 놓은 개혁의 성과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란 절박감이 자리잡고 있다.
실제 최근 여권 핵심인사들의 얘기엔 향후 국정운용과 정국상황에 대한 위기감이 전례없이 짙게 배어 있다. 9월 이전만 해도 지지율 하락에 대해 “태양은 언제나 구름 위에 비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국면 호전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류의 낙관론은 자취를 감추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 고위직 출신인 열린우리당 한 의원은 이를 경제용어인 ‘더블 딥’(Double Dip)에 빗대 설명했다. 더블 딥이란 통상 추락하던 경기가 상승하는가 싶더니 다시 이전보다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는 뜻. 그는 “집권 1년차에 ‘공룡 야당’의 발목잡기로 위기를 맞았던 노 대통령은 탄핵사태를 맞아 국정 안정과 정국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절대 호기를 잡았다.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원내 과반을 확보했던 것이나 한동안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상승곡선을 그린 것이 산물이다. 그러나 여권의 난조가 계속되면서 ‘탄핵 효과’는 급속히 사라졌고 그 결과는 탄핵 이전보다 지지율이 더 낮아지는 위기를 낳았다. 가장 피해야 할 ‘정치적 더블 딥’을 자초한 것이라 하겠다”고 말했다.
사정이 급박한 만큼 여권에 대세 반전을 위한 시간적인 여유는 별로 없어 보인다. 늦어도 올해 말까지 국내 정치와 남북-대미관계, 경제여건 등 주요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구축한다는 것이 여권 핵심부의 판단이다. 여기에는 노 대통령의 국정운용 스타일의 변화와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 전통적 지지기반의 재결집을 위한 정치적 역학구도의 변화 등이 망라되어 있다.
위기 극복을 위한 여권내 모든 액션플랜은 권력구조상 노 대통령의 국정운용 스타일의 변화를 축으로 짜여져 있다. 이제껏 주요 현안에 노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해결해 왔던 만큼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면에선 당(黨)-정(政)-청(靑)간 ‘팀 플레이’ 대신 모든 국정의 부담을 노 대통령이 짊어져야 하는 상황을 만든 여권에 대한 비난도 비등한 터였다.
여권내에선 국정을 다루는 노 대통령의 입장과 태도가 이미 9월 초순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많다. “구시대의 낡은 유물인 국가보안법은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는 국보법 폐지 발언(9월5일) 이후 정국 현안에 대해 입을 닫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근거로 꼽힌다. 여권 핵심인사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국내 문제에 대한 노 대통령의 ‘침묵’은 ‘의도된’ 것이며 앞으로 상당기간 ‘계속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청와대의 설명에 따르면 국보법 처리방향에 대한 언급을 계기로 국내 현안에 노 대통령이 “더 이상 할 말도,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손볼 곳은 이미 다 봤다”는 일종의 ‘상황논리’인 셈이다.
실제 노 대통령은 9월 중순 이후 정상외교와 남북관계 등의 분야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왔다. 러시아-카자흐스탄 방문(9월19~23일)과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참석 및 인도 베트남 방문(10월4~12일)에 이어 앞으로 ▲아시아태평양경제협의체(APEC) 정상회의 참석 및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방문(11월14~21일) ▲ASEAN+3 정상회의 참석 및 영국 프랑스 폴란드 방문(11월29~12월7일)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의 제주 정상회담(7월)에 따른 일본 답방(일정 미정) 등이 예정되어 있다.
연이은 순방 일정에 대해 청와대는 대외적으론 탄핵사태로 일부 국가 방문이 연기된데다 국제회의 개최시점 때문이라 설명한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여권 핵심부도 ‘대통령이 너무 국내 문제, 특히 정치현안에만 몰두한다’는 바깥의 평가를 잘 알고 있다. 다행히 경제 세일즈 외교에 전념하는 노 대통령의 모습이 여론의 호평을 받고 있어 향후 국정 운영 기조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노 대통령은 일찌감치 분권형 국정운영 체제 도입을 통해 가급적 내정은 이해찬 총리에게 총괄하도록 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으며 지금은 그 구체적 실천이라 보면 된다. 일부에서 주장하듯 ‘국내에서 인기가 없으니까 바깥으로만 도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지만 내정에서 가급적 손을 떼고 국가적 현안에 몰두하겠다는 것은 결코 일과성 결정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를 반영하듯 노 대통령은 10월25일로 예정된 2005년 정부 예산안 제출 관련 시정연설도 이 총리가 대독토록 했다.
대외관계에 총력을 경주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구상은 궁극적으로 북핵 사태의 해결을 중핵으로 하는 남북관계의 호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평가다. 비단 정상외교를 통한 우호적인 국제환경 조성뿐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다각적인 움직임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우선 중단상태에 빠진 남북 당국간 대화재개와 관련해서는 10월20일로 예정된 북한 개성공단 개소식이 주목을 끌고 있다. 정부 고위 소식통들에 따르면 남북은 개소식을 전후해 경협사업을 활성화시킬 획기적인 대책을 공동으로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부에서는 장관급 회담의 재개와 국회 차원의 회담, 나아가 노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간 정상회담과 관련한 ‘의미있는’ 언급이 나올 것이란 관측도 유력하게 나오고 있다.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과 이해찬 총리 등 여권 핵심인사들이 정상회담을 목표로 한 대북 특사 파견 필요성 등을 연이어 제기하고 나선 것도 눈여겨볼 사항. 이 의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대북 특사 적임자로 거론하는가 하면 DJ를 직접 만나 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으며 특히 자신이 공개한 방안에 대해 “대통령과 협의해 추진하고자 하며 특사활동의 성과 여부에 따라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의 추진도 고려해야 한다”고까지 밝혔다.
이 총리는 10월16일 진보정치 정상회의 참석차 방문중인 오스트리아에서 총리로서는 이례적으로 북핵 해결을 낙관하는 발언을 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 역시 ‘노 대통령과의 논의를 통해’라는 단서를 달아 “북핵 문제에 대해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여러 시나리오를 상정해 놓고 있다”고 말했다.
닷새 전(10월11일) 노 대통령이 “북핵 문제가 걱정스런 문제이긴 하지만 구조적으로 대단히 안정돼 있다”고 말한 것까지 감안하면 남북정상회담과 그의 최대 전제조건인 북핵 해결에 대해 여권 수뇌부 3인이 마치 ‘입을 맞춘 듯’ 며칠 사이에 연쇄적으로 자신감을 표명한 것이다.
대외 분야에서의 ‘호재’ 창출과 더불어 국내 문제에 대한 해법도 뼈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선 정치분야에서는 정치권내 세력 확충을 통한 전통적 지지층의 재결집을 목표로 다양한 방안들이 거론되고 있다.
이중 핵심은 민주당과의 합당 문제가 될 것이란 예상이다. 민주당이 6·5 전남지사 보궐선거 승리 이후 호남지역에서 상승세를 그리며 열린우리당 지지율을 추월한 터라 여권으로선 전략적 제휴가 불가피한 상황. 특히 내년 4월로 예정되어 있는 국회의원 재·보선이 현재 구도대로 치러질 경우 열린우리당의 원내 과반 의석이 허물어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그전에 민주당과의 합당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내부에서 확산되고 있다.
실제 여권 내에선 통합을 염두에 둔 민주당과의 관계개선 움직임이 곳곳에서 진행중이다.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수감중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위로방문한 것을 시발로 ‘영원한’ 통합론자인 문희상 의원이 추석 연휴 전 한때 ‘주군’으로 받들었던 한화갑 민주당 대표와 접촉한 것이나, 연청에서 잔뼈가 굵은 염동연 의원이 민주당 의원들과 수시로 접촉하고 있는 사실 등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양당내에서도 ‘합당 불가피론’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그동안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이었던 개혁당 그룹 및 영남그룹내에서도 각각 “국보법 폐지 등 개혁입법에서의 양당 공조가 확실히 이뤄진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것” “세 확산 전망이 보이지 않는 영남권 때문에 호남 민심을 돌이킬 카드인 민주당과의 합당을 언제까지 반대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민주당 역시 호남 일색인 소속 의원들은 “서두를 것 없다”는 입장이지만 수도권을 포함한 대부분 원외 인사들은 합당에 적극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 분야에선 12월 발표 예정인 한국판 ‘뉴딜’(New Deal) 정책이 중추를 이루고 있다. 이 방안은 신행정수도 건설과 개성공단 가동을 고리로 한 대북 경협의 획기적 진전 등과 묶어 경기부양의 핵심 수단이 될 전망이다.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이 10월12일 “건설경기 부양과 관련해 미국의 뉴딜정책에 비견되는 국책사업의 입안을 지금 정부와 협의중이다. 핵심은 산업부문과 사회간접자본(SOC) 부문의 대대적인 투자를 유도해 경제활성화에 직접 기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고 밝힌 데 이어 사흘 뒤인 10월15일엔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판 뉴딜 정책의 골격을 12월 중에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이 부총리는 “한두 개 부처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전 부처가 종합적으로 추진하자는 의미에서 종합적 내지는 추가적 투자계획을 마련하고 있다”는 선에서 매듭했지만, 열린우리당내 한 ‘경제통’ 의원은 “기업도시와 골프장, 신행정수도 SOC 등 대형 건설사업으로부터 작게는 노인정과 학교건물, 관공서 등의 현대화 작업과 정보 인프라 확대사업까지 경기부양을 위한 효과가 있다면 모두 망라될 것”이라고 제시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