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난 15일 용의자 동거녀의 결정적 제보를 통해 수사가 급물살을 탔고 용의자 두 명은 다음 날 긴급 체포됐다. 경남지역의 대표적 미제사건으로 자칫 영구미제로 남을 뻔했던 이 사건의 전말을 들여다본다.
2002년 2월23일, 명예퇴직한 전직 형사반장 이아무개씨(당시 58세)와 이씨의 부인 최아무개씨(당시 53세)가 경남 사천시 자신의 별장에서 흉기로 무참히 살해된 채 발견됐다. 이씨 부부가 일주일 전 사천시 별장으로 간 뒤 연락이 두절되자 이씨의 아들이 경찰에 소재확인을 요청했고, 결국 숨진 지 1주일 만에 발견된 것이었다.
당시 이씨는 점퍼와 속옷 차림으로 가슴과 복부에 20여 곳을 흉기에 찔려 엎드린 채 숨져 있었고, 부인 최씨는 가슴 등 10여 곳을 흉기에 찔린 채로 이불에 덮여 있었다. 도난당한 금품은 없었고 숨진 이씨의 승용차만 없어진 상태. 단서라고는 현장에 남아 있는, 크기가 서로 다른 3개의 족적이 전부였다.
사건이 벌어진 곳은 피살된 이씨의 고향으로, 은퇴 후 이씨가 한 달에 서너 번 꼴로 별장에 내려온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을 둘러본 경찰은 족적과 살해 수법으로 보아 최소 3명 이상이 원한관계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피살된 이씨 부부에게선 특별한 채무 관계나 원한 관계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번엔 이씨가 과거 15년 동안 다뤘던 강력사건의 연루자들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였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결국 2002년 12월 수사본부는 해체됐고, 사건은 영원한 미궁 속으로 빠지는 듯했다.
그러나 실마리는 엉뚱한 곳에서 풀려나왔다. 사건 발생 3년여 만인 지난 4월15일 한 여인(44)이 자신의 동거남 이아무개씨(46)와 동거남의 마산교도소 동료였던 윤아무개씨(33)가 범인이라고 김해경찰서에 신고를 해왔던 것. 용의자 이씨의 동거녀가 털어 놓은 얘기는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수사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씨 동거녀의 제보는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사건 당시 용의자 이씨와 윤씨는 금품을 털 목적으로 이씨의 별장에 침입해 금품을 요구했다. 이씨 부부가 완강히 거부하자 이들은 부부를 흉기로 살해했다. 이씨와 윤씨는 범행 다음 날 다시 사건 현장에 찾아가 피살자의 휴대폰을 별장 연못에 던져버리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이때 용의자 이씨는 전날과 다른 신발을 신고 있어서 범행현장에 세 종류의 족적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동거녀는 “당시 이씨가 ‘우리의 범행이 왜 뉴스에 나오지 않느냐’며 자랑스레 얘기해 농담인 줄 알았으나 며칠 후 신문과 방송에 ‘전직 경찰관 부부 피살사건’이 보도되면서 이씨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고 진술했다.
김해경찰서는 당시 살인사건을 맡았던 경남 사천경찰서에 이씨 동거녀의 진술을 전하고 수사 내용과 비교하도록 했다.
김해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당시 사건을 맡았던 수사관이 ‘제보자의 진술 내용이,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수사관계자들만 알고 있던 수사기밀사항과 같다’고 말했다”면서 “제보의 신뢰성이 상당히 높다고 판단해 용의자 이씨와 윤씨를 강도살인 혐의로 긴급체포했다”고 밝혔다.
당시 수사팀이 ‘수사 기밀’로 보안을 지켰던 사항은 ‘족적’과 ‘휴대폰’에 대한 부분. 사건 현장에 세 종류의 족적이 남아 있었는데 그 중 한 족적은 응고된 혈액 위에 찍혀 있었다. 이를 토대로 경찰은 범인이 증거 인멸을 위해 범행 후 다시 한번 현장에 왔다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수사팀은 범행도구를 찾기 위해 숨진 이씨의 별장 연못의 물을 뺐는데 못 안에서 숨진 이씨의 휴대폰을 찾아냈었다.
결국 범인과 수사팀만이 알 수 있는 ‘현장의 비밀’을 동거녀에게 털어놓은 점으로 보아 용의자 이씨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됐다. 여기에 이씨가 동거녀에게 “그 집에 독특한 문양의 바둑판이 있었다”고 말한 대목도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용의자 이씨의 동거녀는 최근 이씨가 다른 여자와 교제하며 변심한 데다 이를 따지는 자신과 자신의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해 제보를 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용의자 이씨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당시 동거녀가 채팅에 빠져 외출이 잦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겁을 주기 위해 지어낸 말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공범 용의자인 윤씨 또한 22일 현재 ‘결백’을 주장하고 있는 상태다.
일각에서는 용의자들이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데다 범행에 사용한 흉기 등 직접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터라 아직은 ‘전직 경관 부부 피살사건’에 마침표를 찍기는 이르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최근 법원이 직접증거를 중시하는 공판중심주의를 추진하고 있어 증거 보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수사 관계자는 이에 대해 “용의자들은 단지 자신들이 죽이지 않았다고만 말할 뿐 적극적인 해명은 못하고 있다. 물증은 없지만 이들의 범행을 증언해줄 유력한 제보자가 있고, 제보 내용이 범인과 수사관계자들 외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고 확실한 정황 증거가 있기 때문에 이들의 혐의를 입증하는 데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