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서부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4월17일 새벽 6시쯤 한 괴한이 대전 용문동의 한 원룸에 침입해 20대 여성 3명을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A씨(21) 등 여성 3명이 만취해 귀가한 직후 집주인으로 가장, 침입해 수건과 커튼을 찢어 피해여성들을 결박하고 차례로 성폭행했다.
당시 범인은 피해여성들이 자신의 얼굴을 못 보도록 이불 등으로 얼굴을 가렸고, 범행 후에는 피해자들이 신고하지 못하도록 피해자들의 휴대폰을 숨기고 현금 22만원을 가지고 달아났다. 피해자들이 휴대폰을 찾아 경찰에 신고했을 때는 이미 범인이 현장에서 멀리 벗어난 후였다.
이 같은 수법은 이제까지 ‘발바리’가 저지른 전형적인 범행 수법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범행시간과 범행수법 등이 ‘발바리’와 똑같았다. 실제로 현장에서 채취한 범인의 체액을 유전자 감식한 결과 ‘발바리’의 것과 일치했다. ‘발바리’가 본격적으로 범행을 재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 1월 청주에서 ‘발바리’가 한 차례 범행한 후 수사가 확대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경찰로서는 이번 사건이 더욱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발바리’에 대한 허위제보나 오인신고까지 늘면서 경찰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99년 1월부터 시작된 ‘발바리’의 연쇄 강도·강간 행각은 유전자 감식으로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49건에 이른다. 대전(34건)을 주무대로 삼았지만 청주(12건)를 비롯해 구미(2건)와 전주(1건) 등지로 원정 범행에 나서기도 했다. 경찰은 성폭행범죄의 특성상 신고하지 않았거나 유전자가 채취되지 않은 사건까지 합하면 발바리의 범행이 족히 1백 건은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가 범행한 곳은 거의 모두 유흥업 종사자들이 밀집된 원룸 및 다세대 지역이었고, 피해여성의 대부분이 유흥업 종사자들이었다. 또한 범행시각도 유흥가 아가씨들이 퇴근하는 새벽 4시에서 오전 9시 사이에 집중됐다. 경찰은 처음부터 ‘발바리’가 범죄에 취약하게 노출된 유흥업 종사자를 노리고 범행을 저질러온 것으로 보고 있다.
‘발바리’가 이토록 오랜 기간 수많은 범행을 저지르고 다니는데도 경찰이 검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수사관계자는 “‘발바리’의 신원을 밝혀낼 만한 물증이 부족한 데다 범행 주기도 길어 애를 먹고 있다. 한번에 여러 건의 범행을 저지르고는 6~7개월씩 잠복기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경찰수사가 맥이 풀리고 잠시 느슨해지면 어김없이 또 다시 범행을 저르는 영악한 면이 있다. 그래서 6년 동안 경찰의 추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게다가 ‘발바리’는 경찰 수사망이 촘촘히 좁혀오면 대전에서 벗어나 청주, 구미, 전주까지 원정 가서 범행을 저지르는 등 경찰의 허를 찌르기 일쑤였다.
한 수사관계자는 “범행 행태로 보아 ‘발바리’는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미리 범행대상을 정하고 사전 답사를 통해 피해자들의 귀가시간 등을 확인하고 범행한 것으로 보인다. 아주 치밀하고 영리한 인물 같다”고 말했다.
한 수사관계자는 “‘발바리’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밝힌 범인의 인상착의도 엇갈리고, 피해자들이 신고 당시 진술한 내용과 술이 깬 후의 진술도 달라 용의자를 특정하기가 어려웠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발바리’를 붙잡는 것이 지금으로선 불가능한 일일까. 피해자들의 진술 가운데엔 몇 가지 공통되는 부분도 있다. 어렴풋이나마 ‘발바리’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는 ‘퍼즐 조각’인 셈이다.
먼저 인상착의. ‘발바리’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의 나이에 왜소한 체격의 소유자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강한 인상을 풍기고, 얼굴이 갸름하고 턱은 뾰족하며 특히 눈매가 무섭다고 한다. 또한 침입 당시 ‘츄리닝’ 운동복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과거 대부분의 범행 때 몸에서 굉장히 역겨운 냄새가 났던 것이 특징이다.
두 번째, 아주 대범하고 노련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강심장을 소유한 강간범이라도 급박한 상황에서는 ‘물건’이 말을 듣지 않아 사정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사정을 하더라도 짧은 시간에 범행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발바리’는 한 번 범행에 2~3명의 피해여성을 차례로 성폭행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피해여성들을 모두 샤워까지 시키는 등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범행했다.
2001년에 ‘발바리’는 여성 7명이 생활하는 다세대주택에 침입해 3명을 성폭행하고 4명을 강제추행한 적도 있었다. 홀로 여러 명의 피해여성들을 상대로 범행하면서도 상해 한 번 입히지 않았다는 점은 그가 그만큼 노련한 범죄자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피해자들이 지적하는 ‘발바리’의 세 번째 특징은 그가 성욕과 지배욕이 강하다는 것이다.
한 피해여성은 “범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온갖 변태적인 성행위를 강요했다”고 말했고, 또 다른 피해여성은 “시녀처럼 자신을 시중들게 했고 마치 왕처럼 행동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발바리’가 금품 탈취보다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데 열중했던 것으로 보아 평상시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지 못하는 인물일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그 외에도 범행 후 피해자들의 현금만 들고 갈 뿐 신용카드나 수표, 귀금속은 손도 대지 않은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경찰이 밝힌 바로는 유흥업소 종사자들이 일주일 중 가장 피곤해하고 술을 많이 마시게 되는 금·토·일요일에 많은 범행을 저지른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과연 ‘발바리’는 어디에 숨어서 제2의 범행을 꿈꾸고 있을까.
경찰은 ‘연쇄 강간범은 반드시 범행장소 인근에 산다’는 범죄학의 ‘기본상식’에 입각해 우선 대전과 청주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대전지역 5개 경찰서에 전담반을 두고, 이와 별도로 충남경찰청에도 수사본부를 꾸릴 정도로 열의도 대단하다.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경찰과 희대의 연쇄 강도·강간범의 쫓고 쫓기는 싸움이 이제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