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 소속 일부 인사들이 검찰 최고위직 인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13년 9월 30일 채동욱 검찰총장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열린 퇴임식에 입장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검찰총장추천위원회(검추위) 반란이 없었다면 채동욱 혼외자 파문은 터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원로급 멘토로 알려진 한 친박계 관계자가 최근 사석에서 털어놓은 말이다. 그의 설명이 이어진다.
“문고리 3인방을 포함해 박 대통령 보좌진 상당수는 채 전 총장 발탁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현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검찰을 통제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검추위 쪽에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검추위는 채 전 총장을 선택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 후 십상시로 알려진 몇몇 참모들이 채 전 총장을 여러 차례 찍어 내리려는 시도를 했고 그 와중에 혼외자 사건이 불거졌다.”
사실 친박 측이 채 전 총장을 껄끄럽게 여겼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통한다. 박 대통령 ‘입’으로 불리는 이정현 의원은 홍보수석으로 재직하던 2013년 6월 채 전 총장에 대해 “MB(이명박) 정부가 임명한 사람”이라고 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MB맨’ 권재진 전 법무부 장관이 꾸린 검추위가 뽑은 검찰총장이라는 의미였다.
이 발언은 친박 기류를 정확히 대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채 전 총장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던 박 대통령 참모그룹의 인식과도 맞닿아 있다. 청와대가 채 전 총장을 밀어내기 위해 혼외자 사건을 활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채 전 총장 사건 때 총무비서관실 소속 행정관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권 배후설이 제기된 바 있다. 십상시들이 채 전 총장만 사정권 안에 포함시켰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앞서의 친박 원로 관계자는 이렇게 귀띔했다.
“김학의 전 차관 역시 검찰총장 하마평에 올랐었는데, 일찌감치 후보군에서 탈락했던 것으로 안다. 그 별장 성접대가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십상시 몇몇 멤버들이 언론에 보도가 되기 전부터 이를 거론하며 김학의 불가론을 폈다. 김 전 차관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박 대통령도 이러한 보고를 받아본 후 김학의 카드는 접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인사 검증 차원에서라기보다는 (십상시 중 몇몇이) 특정 후보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서울고검장 출신의 안창호 대법관을 첫 검찰총장으로 발탁해야 집권 초 국정 운영에 힘이 될 것이란 주장을 했다.”
물론 채 전 총장과 김 전 차관 낙마는 본인들의 부적절한 스캔들 탓이 제일 크게 작용하긴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개입됐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둘의 추문과는 별개로 여권 특정 세력이 고도의 정치적 중립이 요구되는 검찰을 장악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까닭에서다. 정권 ‘입맛’에 맞는 인사를 검찰총장에 발탁하려는 시도 역시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더군다나 십상시들은 검찰 인사에 관여할 그 어떠한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는 곧 공식 라인이 아닌 비선에서 움직였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진다. 이에 대해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정윤회 문건 파동으로 논란에 휩싸였던 현 정부의 비선라인이 정권 초부터 이미 작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파워가 제일 세다는 검찰 조직을 상대로 말이다”라고 말했다.
<일요신문>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법조계 관계자들은 채 전 총장에 대한 ‘학습효과’를 2기 검추위원 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애초부터 반란표를 막겠다는 의도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검추위원은 당연직 위원 5명과 비당연직 4명으로 짜인다. 1기 때는 비당연직에 포함돼있던 중도·진보성향 인사들이 청와대가 내심 원했던 후보들에 대해 강한 비토 견해를 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2013년 10월 발표된 2기 검추위원 비당연직 인사는 여권 성향으로 분류되는 보수인사들 몫이었다. 박근혜 정부 ‘밀실인사’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꼽히는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도 검추위원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야당 의원들은 “비당연직 위원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추천받았는지 의문이다. 총장 사전내정설이 돌고 있는데 추천위가 거수기로 전락한 것 같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2기 검추위원이었던 한 법조계 인사는 익명을 요구하며 “어떻게 해서 그들(비당연직)이 검추위원으로 선정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또 후보자들에게 몇 점을 줬는지도 모른다. 다만, 대검차장 출신이었던 김진태(현 검찰총장) 대세론이 돌았던 것은 맞다. 나도 청와대가 김진태를 내심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얘기를 듣긴 들었다”고 귀띔했다.
“둘 모두 쉽게 수사할 수 없는 대상이다. 검찰은 물론 정권에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실무진은 오죽하겠느냐. 당연히 윗선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들에게 ‘원칙대로 수사하라’는 지침이 여러 번 내려갔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뒤집어보면 채 전 총장이나 김 전 차관 모두 정권에서 버려졌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검사들이 이를 모르겠느냐. 그런데 청와대 민정은 검찰이 장악하고 있는 파트다.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다. 채 전 총장 등에 대한 수사 가이드는 민정이 아닌 다른 곳을 통해 (검찰 등으로) 들어갔다. 박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그룹 쪽으로 알고 있다.”
정윤회 문건 수사 결과 ‘십상시들 회동’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고리 3인방에 대해 ‘일개 비서관’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물론, 박 대통령은 지난 23일 안봉근 비서관이 근무하는 2부속실을 폐지하고, 이재만 총무비서관을 인사위원회에서 제외하며 인적 쇄신에 나서긴 했다. 이에 대해서도 정치권에서는 ‘3인방 퇴진’을 요구하는 국민들 눈높이와는 거리가 먼 수습책이라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새정치연합의 한 중진 의원은 “박 대통령에겐 당연히 일개 비서관이다. 그런데 그들이 ‘VIP 뜻’을 꺼내는 순간부터 실세 중 실세가 된다”면서 “십상시 멤버가 박관천 경정 문건 내용처럼 회동을 하고 그러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비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증언들은 속속 나오고 있지 않느냐. 일부 조직을 개편하거나 역할을 조정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