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17일 경찰이 아내를 살해해 집 안방과 현관에 나눠 암매장한 권아무개씨의 집에서 사체를 발굴하고 있다. 사진제공=부산일보 | ||
부산 영도경찰서는 지난 6월8일 부산 영도구 한 가정집에서 A씨(여·63)를 흉기로 살해한 혐의로 A씨의 내연남 권아무개씨(66)를 검거했다. 경찰은 수사 도중 권씨가 빚에 쪼들려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에도 3년 전 가출해 연락이 끊긴 아내 손아무개씨(당시 58세) 명의로 매월 20만원 안팎의 보험료를 납입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가출’ 후 아내 손씨가 친정 식구들에게조차 한 번도 연락을 해온 적이 없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이런 점들을 수상히 여겨 권씨를 계속 추궁한 끝에 결국 엽기적인 ‘아내 살해 유기극’의 전모가 서서히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권씨는 3년 전 말다툼 끝에 아내를 살해했으며, 사체를 안방 구들장에 암매장한 후에도 최근까지 안방에서 버젓이 생활해왔다.
한 경찰 관계자는 “수사를 진행하면서 권씨의 치밀하고 잔인한 범행에 한번 놀랐고, 범행 후 증거를 은닉하고 알리바이를 조작하는 권씨의 침착함과 냉혹함에 또 한번 놀랐다”고 말했다. 경찰이 전하는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2002년 10월28일 오후 3시 권씨의 부산 영도구 집 뒤편 목공소. 평소 아내의 상습도박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던 권씨 부부가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날도 부부싸움의 불씨가 된 것은 아내 손씨의 도박벽. 이를 꾸짖는 자신에게 손씨가 “남자가 무능력하다”고 폭언을 퍼붓자 권씨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만다. 결국 그는 아내 손씨를 목 졸라 살해했다. 궁리 끝에 권씨는 범행을 숨기기 위해 손씨의 사체를 안방 구들장밑에 암매장했다. 그리고 1주일 뒤 경찰에 가출신고를 했다.
수사관계자는 “권씨에게 세 자녀가 있으나 모두 출가해 타지에서 살고 있어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는 상상도 못했다”고 전했다. 또한 예전에도 손씨가 도박을 하기 위해 며칠씩 연락도 없이 집을 나간 적이 있어 자식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아내 손씨의 사체가 드러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로부터 3개월 후인 2003년 1월, 권씨는 대대적인 집 보수공사를 벌였다. 그는 안방 구들장 밑에서 아내의 시신을 꺼내 거실 현관 쪽에 다시 묻으려 했으나 공간이 협소하자 시신을 토막 내 머리는 안방에, 몸통은 거실 현관 쪽에 파묻었다. 경찰에 따르면 목수 경력 30년 이상의 베테랑인 권씨가 집 보수공사를 혼자서 다 했고 사체를 파묻을 때에도 사체 위에 흙으로 한 번 덮고, 그 위에 다시 시멘트를 바르는 등 이중 삼중으로 꼼꼼히 처리해 시신 썩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과학수사반의 한 수사관은 “보통 사체를 암매장할 때 아무리 잘 묻어도 시체 썩는 냄새가 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권씨는 아내의 사체를 어찌나 꽁꽁 묻었는지 권씨의 집에서 썩는 냄새도 전혀 없었고, 사체를 발굴할 때도 애를 먹었다”고 전했다.
권씨는 아내의 시신 일부가 묻힌 안방 온돌에서 그냥 잠자기가 꺼림칙했는지 이때부터 침대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현장검증에 참여한 한 경찰관은 “방에는 다정하게 찍은 가족사진을 걸어놓고 있어 기가 찼다”고 전했다.
아내 손씨를 죽인 뒤 권씨는 이처럼 ‘완전범죄’를 꾀했지만 결국 3년여 뒤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면서 꼬리를 밟히게 된다.
경찰에 따르면 권씨는 아내 손씨와 불화를 빚던 무렵인 2000년 초부터 자신의 30년지기인 B씨의 아내 A씨와 몰래 내연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 과정에서 A씨에게 1억여원을 빌려줬으나 돈을 돌려받지 못하자 최근 들어 부쩍 말다툼이 잦았다고 한다.
자신의 자동차까지 가압류될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던 권씨는 최근 A씨에게 “빌려준 돈 중에서 5백만원이라도 먼저 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으나 A씨가 차갑게 거절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권씨는 “내가 그 동안 얼마나 도와줬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며 A씨와 자주 다퉜고 그 과정에서 폭행도 행사했다. 그러다 “당신 마누라도 이런 식으로 때리고 살았느냐”, “예전에 당신 마누라도 같이 살 때 고생 많이 했겠다”는 A씨의 말에 격분, 서씨를 살해할 마음을 먹게 됐다.
수사관계자는 “채무 1억원보다는, 권씨가 A씨의 말을 듣고 ‘혹시 A씨가 내가 아내를 죽인 것에 대해 낌새를 챈 게 아닐까’하는 우려 때문에 살인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A씨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권씨는 이때부터 침착하게 범행을 꾸몄다.
먼저 지난 5월28일 새벽, A씨의 집에 몰래 들어간 권씨는 미리 준비한 시너를 현관과 거실에 뿌리고 불을 질러 A씨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때마침 잠에서 깨어난 A씨가 119에 신고하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지난 6월8일 오후 3시께 권씨는 두 번째 살인을 시도했다. 자신이 직접 흉기를 들고 A씨의 집에 침입해 머리와 목 등 A씨의 온몸을 수십 차례 찔러 숨지게 했던 것.
범행 직후 권씨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꾸미기 위해 구청에 들러 개인 용무를 보기도 했다. 한 수사관계자는 “권씨의 범행 자체도 잔인하지만 범행 후 행동은 정말 냉혹했다. A씨 살해과정에서 피 묻은 장갑을 가위로 수십차례 갈기갈기 찢은 뒤 자신의 집 수세식 변기에 넣어 물을 내려버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마침 사건 당일 권씨의 절친한 친구이자 숨진 A씨의 남편인 B씨가 권씨에게 전화해 “아내가 전화를 안 받는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자네가 가서 확인 좀 해주게”라고 부탁을 해왔다. 권씨는 태연히 A씨의 집 앞에서 이웃집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A씨를 부르는 시늉을 하며 친구 B씨에게 전화해 “대문도 잠겨 있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라고 전했다. B씨가 권씨의 알리바이만 확인시켜 준 꼴이었다.
게다가 권씨는 A씨의 장례식에도 참석하고 장지까지 따라가 친구 B씨를 위로하는 등 주변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침착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오히려 경찰은 A씨와 가까웠던 권씨의 이같이 ‘너무 침착한 행동’을 의심했다.
경찰은 내심 권씨를 A씨 살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으나 한동안 수사는 제자리걸음이었다. 권씨의 알리바이가 비교적 명확한 데다 지문이나 살해도구 등 범행을 입증할 만한 증거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 수사관계자는 “탐문수사로 권씨와 A씨 사이에 금전관계와 내연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밝혀내 권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올려놨지만, 권씨가 범행 후 흉기와 피 묻은 옷가지 등 증거가 될 만한 것을 모두 인근 야산에 묻어버려 이 사건은 자칫 영구 미제 사건이 될 뻔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권씨의 ‘완전범죄’ 구상을 깬 것은 과학수사였다. 사체 부검결과 A씨의 손톱 밑에서 권씨의 DNA가 검출됐다. A씨가 권씨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권씨의 피부조직 일부가 손톱 밑에 남겨진 것이었다. 권씨를 검거한 영도경찰서 박동진 경사(51)는 “목격자와 범행도구를 발견하지 못한 상황에서 과학수사로 실마리를 풀 수 있었다”고 말했다. 권씨는 검거 당시 진술을 거부하며 버텼으나 경찰이 DNA 분석 결과를 제시하자 마지못해 범행을 자백했다.
당시 수사팀 내에서는 가출 신고된 권씨의 아내 손씨도 ‘권씨에게 변을 당한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권씨의 아내 손씨가 가출 당시 휴대폰과 지갑 등 개인 소지품을 집에 두고 나간 데다 권씨가 아내 명의의 보험을 3년이 되도록 해지하지 않고 보험료를 납입하고 있는 점을 수상히 여겼던 것. 사실 권씨는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아내를 계속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보험료를 내왔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권씨가 자신의 ‘심정적 알리바이’를 내세우기 위해 꾸준히 냈던 보험료가 도리어 의심을 사게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수사팀은 ‘성인 가출’의 경우 자식이나 가까운 친척들과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 보통인데 손씨 가족들의 통신 수사 결과 지난 3년간 단 한 차례도 손씨가 가족들에게 연락하지 않은 점도 주목했다. 뿐만 아니라 권씨가 경찰 조사에서 아내 손씨의 얘기만 나오면 미세하게 손을 떨거나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보고 수사팀은 권씨가 아내까지 살해한 것으로 확신했다.
강력 4팀 서무성 경장(39)은 “‘모든 걸 털어내야 저승 가서도 편하고 자식들한테도 좋지 않겠나’며 적극적으로 설득하자 권씨가 아내 손씨를 살해한 사실을 실토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권씨는 이 와중에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마당에 꽃을 심어놨는데 관리해 줄 사람이 없으니 그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사실이 틀통났음에도 가책의 눈물보다는 ‘꽃타령’을 남긴 권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