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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검찰은 이들 부부를 ‘존속유기치사’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서울지법 의정부지원 형사합의1부(재판장 강재철 부장판사)는 뜻밖에도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과연 누구에게 얼마만큼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현재 재판부는 직권으로 변론을 재개하고 ‘친척과 이웃 등 주변사람들의 증언을 더 들어봐야 한다’며 판결을 미루고 있는 상태다.
과연 아들과 며느리는 언론 보도대로 매정한 불효자식들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말못할 사연이 있었던 걸까. 한 가족의 ‘불행했던’ 과거사 속에서 그 단초를 찾아봤다.
할머니는 죽기 전까지 외아들 이재선씨와 며느리 박씨(구속중), 그리고 손자 손녀와 같이 살고 있었다. 기자는 먼저 ‘현장’인 이씨의 집을 둘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의 집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일산 신도시의 빼곡히 늘어선 아파트촌을 뒤로하고 논밭이 보이는 시골길을 한참 달린 끝에 그의 허름한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이씨는 2년 전 논밭이었던 이곳에 조립식 집을 짓고 어렵게 정착을 했다고 한다. 집에 도착하니 마침 이씨는 한 방송사의 생방송 프로그램과 인터뷰중이었다. 방에선 간간이 이씨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천하의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하지만 어머니를 ‘굶겨 죽인’ 아들과 며느리에 대한 세상의 따가운 관심은 그를 ‘말 없는 죄인’으로만 내버려두진 않았다.
방송사와의 인터뷰가 끝나자 기자는 그에게 ‘잔인하게’ 다시 인터뷰를 청해야만 했다. 순박한 첫인상대로 그는 인터뷰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하지는 못했다. 같은 말을, 그것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 그에겐 고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의 가슴 속에는 밤을 새워도 다하지 못할 절절한 사연이 꾹꾹 눌려 담겨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씨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했다. 그는 홀로 남은 어머니와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초근목피’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던 끝에 단비가 왔다. 자신이 일곱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재가를 한 것이다. 아버지도 ‘새로’ 생겼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의붓아버지는 그를 친자식 이상으로 대해주었다. 자신의 호적에도 올리려 했으나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진 못했다고 한다. 그는 ‘소실’의 자식이었지만 의붓아버지의 사랑으로 행복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는 가진 재산이 별로 없었다.
이씨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홀로 상경한다. 열두 살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렵게 10대 시절을 보낸 그는 스물한 살 때 인생의 크나큰 시련을 맞는다.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오른손가락 3개를 절단당했던 것. 이때부터 그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냉대와 차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날품을 팔고 싶어도 잘려나간 손가락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일감은 없는 날이 더 많았다. 공장 취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느덧 가난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그가 스물다섯이 됐을 때 의붓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갈 데가 없던 어머니와의 동거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그럭저럭 장가갈 나이가 되자 그는 초등학교 후배인 지금의 부인 박정순씨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손가락이 없는 ‘장애인’ 이씨는 쉽게 자신의 마음을 열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런데 박씨는 달랐다. 성치 않았던 이씨의 손가락도 허물없이 받아주었던 것. 이씨는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참 고마운 사람’ 박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어머니와 아들 부부 셋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기도 잠시. 이씨는 아내 박씨와 어머니 사이에서 흐르는 묘한 ‘한류’를 느끼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깔끔하고 직선적인 성격이었다. 반면 며느리 박씨는 행동이 느리고 평소에도 말이 거의 없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성격은 쉽게 어울릴 수 없는 물과 기름과도 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부간의 갈등은 점점 도를 넘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빨래한 것을 보고 지저분하다며 다시 빨아서 입는 등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남편에게 ‘어머니께서 억지소리를 하신다’며 억울해했다고 한다.
마침내 결혼 2년여 만에 시어머니는 따로 살겠다며 ‘분가’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십수년이 흘러 어머니가 나이가 들자 이씨는 2년여 전부터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15년여를 떨어져 지내다 다시 함께 살게 된 고부. 하지만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마음의 벽은 여전히 두텁게 남아 있었다.
며느리 박씨는 간경변 증세 탓에 힘든 일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집에서도 행동이 ‘굼뜰’ 수밖에 없었다. 잠도 하루에 15시간 이상을 자야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더군다나 말이 별로 없는 성격이라 주변 일을 ‘시시콜콜히’ 시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느릿느릿하고 살갑지도 않은 며느리가 미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인 ‘밥 굶기’도 이런 배경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지은 밥을 먹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밥을 해서 들여가면 ‘먹고 싶으면 달라고 할 테니 들여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시어머니가 직접 밥을 지어먹겠다고 해서 아들이 방안에 가스레인지와 취사도구를 놓아주었다고 말한다. 시어머니가 평소 라면을 좋아해 혼자서 자주 끓여먹기도 했다는 것. 그런데 어떻게 시어머니가 굶어 죽게 된 것일까.
검찰측 주장은 이렇다. 부검 결과 시어머니는 사망 당시 체중이 20kg였고 위와 장이 비어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교통사고로 골반을 다친 그녀는 평소 거동이 불편했다. 그런데 사망 며칠 전부터는 음식물 공급이 끊겼고 결국 그로 인해 ‘아사’하게 됐다는 결론이다.
사건 초기 아들로부터 신고를 받은 일산경찰서측은 처음엔 일반 변사사고인 줄 알고 수사를 했다. 그런데 사정을 알아보니 혐의가 있었다고 경찰측은 말한다. 한 관계자의 얘기.
“사망 전 10일 이상이나 어머니를 돌보지 않았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한 가정에서 10여 일 동안 그런 일을 모를 수 있나. 그래서 의도적인 유기치사로 보고 이 사건을 수사했다. 그리고 며느리로부터 범행사실 일부를 자백받았다.”
경찰은 아들과 며느리 모두를 존속유기치사 혐의로 입건한 뒤 아들을 구속하겠다고 검찰에 품신했다고 한다. 그런데 검찰은 며느리만 구속하라고 지휘했다. ‘아들은 낮에 일하러 가지만 전업주부인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돌봐야 할 책임이 있다’며 거꾸로 며느리를 구속하도록 한 것.
이 사건을 송치받은 의정부지청 고병민 검사는 ‘아들과 며느리가 어머니에게 음식물을 제공하지 않고 간병도 않은 채 방치함으로써 기아로 사망에 이르게 했다’며 며느리는 구속, 아들은 불구속 상태로 기소했다. 재판에서 두 사람은 각각 징역 7년과 5년을 구형받은 상태.
하지만 변호인의 입장은 이런 시각과 완연히 다르다. 두 사람 중 누구에 대해서도 이번 사건에 대해 책임과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죽일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얘기다. 변호인측의 주장은 이렇다.
검찰측은 사망 전후 10여 일 동안 가족들이 할머니를 돌보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들 이씨가 밝힌 어머니의 잠 습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머니는 한 번 주무셨다 하면 굉장히 오래 주무신다. 그리고 5~6번 흔들어 깨워야 일어날 만큼 잠귀도 어두운 편이다. 또한 주무실 때 깨우면 짜증을 많이 내는 편이다. 그래서 가족들 모두 어머니가 주무실 때 안깨우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로 통했다. 그리고 주무시는 자세도 거의 바꾸지 않고 같은 모습으로 항상 누워 계셨다.”
아들 이씨에 따르면 어머니 사망 전후에도 가족들이 열린 문틈으로 자주 안을 ‘살펴’ 보았다고 한다. 또한 사망 전에는 며느리와 딸 둘이 교대로 밥상을 차려 시어머니에게 가져갔으나 그대로 자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가족들이 시어머니의 평소 잠 습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망 뒤 변함없는 그의 잠자리 자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씨는 “평소처럼 어머니께서 주무시는 줄 알았지 돌아가셨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땅을 치고 자신의 ‘불찰’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씨와의 인터뷰 도중 기자는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마침 그의 둘째딸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기자는 할머니 사건이 손녀가 듣기에는 적절치 않은 것 같아 밖에서 인터뷰를 계속하자고 이씨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씨는 뜻밖에도 “나는 내 딸에게 숨길 게 하나도 없다”며 둘째딸을 자신의 곁에 앉혔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어머니 사망 하루 전에도 딸들에게 전화를 걸어 ‘할머니 잘 계신지 살펴보아라. 밥도 차려드려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둘째딸은 이에 대해 “전화를 받고 할머니를 살펴보니 주무시는 것 같아 깨우지 않고 밥도 가지고 나왔다”고 말했다. 이씨나 며느리가 의도적으로 어머니를 죽게 내버려두었다면 이씨는 왜 그런 전화를 걸었을까. 과연 ‘할머니’와 같이 지내던 손녀딸과 손자도 ‘공범’으로 봐야 하는 걸까.
이씨 사건을 수임한 표아무개 변호사는 이번 사건에 대해 무척 조심스런 입장을 보였다. 아직 판결이 남아있기 때문에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도 정중히 사양했다. 어떤 식으로든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하지만 계속된 설득에 표 변호사는 잠시 입을 열었다.
그는 “이번 사건은 처음 언론에 보도될 때부터 피고인들이 ‘천하대죄’를 진 매정한 부부로 몰려 변호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피고인은 판결 전까지 무죄추정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번 사건은 이미 유죄를 인정해놓고 그에 대한 반론을 하는 것 같아 더욱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표 변호사는 “무엇보다 이씨 부부의 착한 심성을 보고 그들이 의도적으로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며느리가 경찰 조사 때 혐의사실을 일부 인정한 사실에 대해서도 “시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고 경황이 없어 그냥 ‘예’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표 변호사뿐만 아니라 이씨 주변 사람들도 이번 사건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사망한 어머니가 20여 년 동안 다니던 일산의 N교회 목사 김아무개씨도 이씨 부부의 선처를 호소했다.
“할머니(이씨 어머니)의 성격은 한 마디로 ‘겨울 찬바람’ 같았다. 경우도 바르고 깔끔한 성격이었지만 한편으론 여느 할머니들 같이 변덕도 있고 잔소리도 심했다. 그런데 한 번 틀어지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은 성격이었다. 며느리와 사이가 안좋아 자주 다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내가 몇 번 그렇게 하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할머니를 굶겨 죽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가정에 이런 일을 막을 만한 대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성격을 넘어서지 못한, 대화의 단절이 이런 참혹한 결말에 이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사건 판결을 맡은 강재철 부장판사도 판결봉을 쉽게 두드리지 못하고 있다. 강 부장판사는 이번 사건에 대한 언론의 지나친 관심도 경계하고 있었다. 판결 전 조심스런 그의 입장을 들어보았다.
“이번 사건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인간 관계는 일방적인 잘못에 의해 결정나는 것은 없다. 언제나 사건에는 그 이면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리고 법원의 판결은 검사나 변호사보다 더 포괄적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중요하다. 그래서 판결을 뒤로 미루고 좀더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려 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오는 5월30일 판결 때 이례적으로 판결이유서도 낼 계획을 세울 만큼 이번 사건에 대해 신중을 기하고 있다.
과연 법원은 전업주부인 며느리에 더 큰 책임이 있다며 돌을 던질까, 아니면 어머니를 돌보지 못한 아들에게 책임을 물을까. 이도 저도 아니면 두 사람의 ‘불찰’을 그대로 덮어줄 것인가. 재판부가 이번 사건에서 어떤 솔로몬의 지혜를 보여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불효자’의 눈물 “할 말은 없지만 너무들 하네요”]
‘불효자’ 이선재씨는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요즘은 그나마 일거리도 없어 막막하게 지내고 있다. 이번 일 때문에 빚도 많이 졌다고 한다. 그는 찢어지는 가난은 참을 수 있지만 주변사람들의 손가락질은 정말 참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전혀 그런 적이 없는데도 ‘어머니를 춥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보일러 호스를 끊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머니는 먹을 게 없어 죽었는데 그 집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꽉 차 있었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구요. 사실 이 살림에 풍족한 게 뭐 있겠습니까. 장례식 끝난 뒤 남은 음식을 모아둔 것을 갖고 그런 말들을 떠드니 정말 억장이 무너집니다.
심지어 ‘일부러 어머니 방의 문을 항상 닫아두고 살았다’는 얘기까지 들려오는데 귀를 막고 살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그 문이 아귀가 맞지 않아 꽉 닫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든요. 가족들이 그 틈으로 어머니의 안부를 살펴보곤 했는데???.”
한동안 억울함을 호소하던 이씨는 어머니의 ‘황망한’ 죽음에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겠느냐”며 끝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