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여름 발생한 일명 ‘돈암동 살인사건’도 그중 하나다. 이 사건은 살인을 둘러싼 여러 의문점들 외에도 피해자가 명문대 출신의 재력가 며느리라는 점에서 더욱 큰 관심을 모은 바 있다. 하지만 이 사건 역시 범인을 추적할 만한 증거가 없어 그후 1년 반이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경찰의 속을 태우고 있다.
사건은 지난 2005년 6월 16일 오후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한 미분양 아파트에서 한 여성의 변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광고 전단지를 돌리던 인부에게 우연히 발견된 이 여성은 겉옷이 찢어지고 속옷이 벗겨진 반라 상태로 안방 욕실에 쓰러져 있었다. 후덥지근한 초여름 날씨 때문이었을까. 사체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패된 상태였다.
경찰은 집 안에 남아 있던 소지품 등을 통해 피살자의 신원파악에 나섰다. 확인 결과 이 여성은 한 지방 대학을 나온 뒤 서울의 한 명문 사립대에 편입, 2005년 초에 졸업한 A 씨(당시 30세)로 밝혀졌다. A 씨는 2004년 수백억원대 부동산 재산가의 아들과 결혼한 신혼주부이기도 했다.
이 명문대 출신 준재벌 집안 며느리의 죽음은 처음부터 미스터리투성이였다. 겉보기에 무엇 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A 씨가 아무 관계도 없는 빈집에서 사체로 발견된 것 자체가 의문의 시작이었다.
발견 당시 A 씨의 사체는 완전히 부패해 폭행이나 결박 흔적조차도 육안으로 감별되지 않았다. 경찰은 부검을 의뢰했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역시 ‘워낙 사체의 부패 정도가 심해 사인이 불분명하다’는 소견을 보내왔다. 하의가 벗겨져 있었지만 성폭행 흔적도 발견되지 않아 경찰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대체 A 씨는 왜 그 아파트에 갔던 것일까. 자의에 의해서였을까, 아니면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끌려갔던 것일까. A 씨의 사체가 발견된 아파트는 신축 후 입주를 기다리던 미분양 아파트였다. 서울시 외곽에서 살던 A 씨가 멀리 떨어진 동네의 미분양 아파트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일단 경찰은 누군가 A 씨를 빈집으로 유인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판단했다.
입주가 시작되지 않은 빈집인 터라 문제 아파트의 현관 자동잠금장치의 비밀번호는 모두 ‘0000’ 식으로 통일돼 있었다. 따라서 경찰은 “집주인이 입주해서 현관 자동잠금장치의 비밀번호를 바꾸기 전에는 누구나 쉽게 빈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A 씨를 이곳으로 유인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또한 A 씨가 ‘누군가’를 순순히 따라갔다면 이번 사건은 분명 A 씨와 친분이 있는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다.
경찰은 A 씨가 아무 연고도 없는 돈암동의 미분양 아파트에 들어간 이유를 밝히는 것이 바로 사건 해결의 키라고 보고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사건 현장 주변을 훑으며 여러 차례 탐문수사를 벌였지만 A 씨가 언제 누구와 그 아파트에 들어갔는지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경찰이 주목한 것은 사체의 혈중 알코올농도가 0.15%였다는 사실. 평소 술을 잘 못하는 것으로 알려진 A 씨가 왜 만취할 정도로 과다한 양의 술을 마시고 사체로 발견됐는지도 의문이었다. 생전에 A 씨가 술을 즐기지 않았다는 주변사람들의 얘기로 보아 그가 혼자 술을 마셨을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였다. 또 당시 A 씨가 홀로 과음할 정도로 어떤 돌발적인 문제로 고민을 했다는 정황도 드러나지 않았다.
경찰은 누군가 술에 취한 A 씨를 끌고 들어가 살해했을 가능성도 열어두고 다각도로 수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 강도에 의한 우발적인 범행’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았다.
우선 사건 발생 전 수일간 A 씨의 행방이 묘연했다는 점이다. A 씨는 사체로 발견되기 일주일 전에 행방불명되어 이미 실종신고가 돼 있는 상태였다. 경찰 수사는 자연히 A 씨의 그간 행적에 집중됐다. 하지만 사체 발견 일주일 전인 6월 9일 오후 2시쯤 출신 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은행의 폐쇄회로 화면에 찍힌 것이 A 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시간 이후 그를 봤다는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이 가진 단서라고는 형체조차 파악이 되지 않는 부패된 사체뿐이었다. 경찰은 이날 이후 A 씨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은 점과 사체의 부패 정도로 보아 A 씨가 이날 피살된 것으로 추정했다. 또 A 씨의 소지품이나 현금 등이 없어지지 않은 점으로 미뤄 강도살인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대신 경찰은 A 씨가 준재벌가 며느리라는 점을 감안, 누군가 재산을 노리고 접근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우발적으로 살해했을 가능성 혹은 어떤 원한에 의한 청부살인의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경찰은 A 씨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다시 탐문 수사에 나섰다. A 씨가 평소 자주 드나들던 장소가 자신이 졸업한 대학교 주변이었다는 점에서 교내에서 그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이 와중에 A 씨가 특히 이 대학의 B 교수와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된다. 이렇다 할 증거물도 목격자도 없어 제자리걸음을 계속하던 수사는 이를 계기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녀관계를 염두에 둔 수사는 당사자들에게 상당히 민감한 문제인 터라 경찰은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설사 심증이 있더라도 당사자가 부인할 경우, 또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을 경우에는 경찰로서도 달리 수사를 진척시킬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오히려 피해자는 물론 유가족들에게 엄청난 상처만 안길 수도 있는 문제였다.
A 씨는 대학 재학시절 개교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B 교수와 친분을 맺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A 씨가 기념행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당시 안면을 익힌 두 사람이 이후 만남을 지속해온 것으로 파악했다.
경찰은 용의선상에 떠오른 B 교수를 다섯 차례에 걸쳐 조사했다. 조사과정에서 실종 당일에도 B 교수와 A 씨가 만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B 교수는 A 씨가 실종된 9일 낮 12시께 연구실에서 A 씨와 함께 도시락을 먹으며 시간을 보낸 것으로 확인돼 더욱 의혹을 샀다. 이때 이후로 A 씨의 행적이 묘연했다는 점에 비춰볼 때 B 교수는 A 씨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경찰은 사건 당일 B 교수의 알리바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하지만 B 교수는 A 씨와 관련된 의혹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는 “그날 연구실에서 도시락을 함께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A 씨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점심식사를 하는 등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이내 헤어졌고 A 씨의 그후 행적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A 씨의 가슴에 묻어 있던 타액을 수집해 DNA 분석을 실시했으나 B 교수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시 사건 현장에서는 두 가지 증거물이 나왔다. 아파트 부엌에서 A 씨의 머리카락과 남성용 와이셔츠 단추가 발견됐는데 경찰은 사건 당일 A 씨와 범인 간에 실랑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와이셔츠 단추가 떨어질 정도라면 상당히 격렬한 몸싸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경찰은 이 단추의 주인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수사력을 집중시켰으나 끝내 단추의 주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한때 용의선상에 올랐던 B 교수는 물론 B 교수의 부인과 A 씨 주변 인물들을 모두 조사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던 사건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졌다. 경찰은 A 씨의 남편과 그 주변에 대해서도 다시 조사를 벌였다. 이미 알려진 대로 A 씨는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신혼주부였다. A 씨의 결혼생활은 겉보기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으나 남편과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준재벌급인 시댁과의 문화 차이와 자연스럽지 못한 부부관계로 인한 갈등이 결혼생활의 걸림돌이었다는 것. 국내 굴지의 직장에 근무하다 서울의 다른 명문대 대학원에 진학한 A 씨의 남편은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활달하고 사교적인 A 씨는 결혼생활의 답답함과 남편과의 성격 차이로 인한 고민을 평소 B 교수에게 털어놓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A 씨와 B 교수와의 실제 관계가 어떠했는지 또 A 씨의 남편이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생활이라는 점을 들어 말을 아끼고 있다. 하지만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파탄으로 끝날 정도의 불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게 경찰의 얘기다. 수사 결과 A 씨의 남편은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확실했고 A 씨의 죽음과 연관지을 수 있는 아무런 혐의점도 드러나지 않았다.
경찰은 A 씨가 평소 학교에 자주 드나들었던 점을 감안, A 씨의 지인들도 조사했지만 역시 단서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A 씨는 원만한 학교생활을 했으며 지인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평판이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행동을 할 성격도 아닐 뿐더러 평소 특별한 문제도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A 씨의 지인이라고 밝힌 한 사람은 “A 씨가 B 교수와 깊은 관계였다는 항간의 소문은 말도 안 된다. 교수와 가깝게 지냈다는 것만으로 불륜이나 치정관계로 매도하는 것은 A 씨를 두 번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A 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글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
경찰은 이번 사건을 다각도로 분석,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A 씨와 친분을 맺었던 특정 다수에 대한 심층 수사를 벌여왔지만 아직 특별한 혐의점을 발견하지는 못한 상태다.
사체는 있는데 물증이 없는 이 의문의 살인사건을 다루는 경찰의 속마음은 숯덩이마냥 점점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사건을 담당한 성북경찰서 관계자는 “정말 모든 게 미스터리투성이다. 여전히 수사를 하고는 있지만 더 이상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없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과연 A 씨가 연고도 없는 미분양 아파트에 들어간 까닭은 무엇일까. 사건 현장에 남겨진 남성용 와이셔츠 단추는 대체 누구의 것일까. 술을 가까이 하지 않던 그가 만취 상태에 이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건이 벌어진 뒤 1년 반이나 시간이 흘렀지만 A 씨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