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지난 2월 6일 상습사기 혐의로 주부 이 아무개 씨(31)를 구속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씨는 국가기관 요원인 양 행세하며 주변 지인은 물론 자신의 부모와 남편까지 속이는 등 철저한 이중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주부의 기상천외한 엽기 사기행각은 무려 7년 넘게 이어졌다. 실제 비밀요원을 방불케 한 이 씨의 이중생활을 뒤쫓아가봤다.
1996년 상고를 졸업한 뒤 작은 회사에 경리로 취직한 이 씨. 2년 동안 회사에 다녔지만 매일 똑같은 업무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생활에 이 씨는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회사를 그만둔 이 씨는 속기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국회 속기사로 취직하겠다는 게 그의 소박한 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씨는 국가안전기획부(옛 국정원)의 취업공고를 보게 된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뒤진 결과 안기부에서도 속기사를 고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반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국가정보기관이라는 것 자체가 더없이 큰 매력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씨는 정작 안기부에 응시서류 한 번 내지 못했다. 속기사 자격증을 따긴 했지만 여러 가지 까다로운 자격 요건 때문에 스스로 도전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이 씨가 안기부 직원을 사칭한 것은 말 그대로 ‘우발적’이었다. 지난 1999년 오랜만에 동창회에 나간 이 씨는 친구들 앞에서 소위 ‘잘나가는’ 행세를 하고 싶었다. 그러다 언뜻 떠오른 생각이 바로 한때 꿈이었던 안기부 요원. 이 씨는 친구들에게 안기부에 속기사로 취직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대단하다’ ‘거기 대단한 곳 아냐’라는 친구들의 치켜세움에 이 씨의 거짓말은 점점 대담해졌다. 결국 이 씨는 부모에게도 번듯한 딸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 안기부에 취직했다고 밝히기에 이른다. 여상을 졸업한 뒤 국회사무처 등에 속기사로 취직하려던 딸의 모습을 봐왔던 이 씨의 부모는 안기부에 취직했다는 이 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다. 이 씨의 기나긴 가짜 행세는 이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낳게 마련. 자신의 신분이 탄로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씨는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바뀐 이후 ‘국정원 자금담당요원’ ‘비자금 담당 국정원 비밀요원’으로 직함을 바꾸어가며 주변 사람들을 속였다.
문제는 돈이었다. 무직인 이 씨가 수입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주변에 국정원 비밀요원 행세를 하고 다니느라 일종의 ‘품위유지비’로 많은 돈이 들어갔다. 옷도 싸구려는 입지 않았으며 각종 경조사와 모임에도 일일이 참석, 적지 않은 축의금과 고급 화환을 보내곤 했다. 이 씨는 겉으로는 항상 당당하고 럭셔리한 국정원 요원 행세를 했지만 실상은 불어나는 카드값에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이 씨는 카드 여러 개를 돌려막는 수법으로 필요한 돈을 그때그때 충당했는데 그 결과 카드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새 5000만 원에 달했다.
카드회사의 독촉은 날로 거세졌다. 도저히 빚을 감당할 길이 없던 이 씨는 자신의 거짓 신분을 이용해 본격적인 사기행각을 벌이기로 계획한다. 그 첫 번째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였다.
지난 2003년 이 씨는 아버지에게 “국정원이 모 기업으로부터 정치 비자금으로 받은 어음이 있는데 이 어음을 현금화하는 데 시간과 돈이 든다. 여기에 투자하면 연 25% 이자를 쳐서 돌려주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딸이 국정원에 다니는 줄로 믿고 있던 아버지는 평소 이 씨를 대견스럽게 생각해오던 터. 게다가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그간 모아둔 돈 1억 원을 선뜻 건네줬다.
국정원 비밀요원이라는 직함이 갖고 있는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국정원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이 씨를 만만히 대하지 못했고 오히려 더 신뢰하는 듯했다. 이 씨는 같은 수법으로 삼촌에게도 3억 원을 빌렸다. 가족과 친지들이 쉽게 속아넘어가자 이 씨는 점점 대담해졌고 씀씀이 또한 자꾸 커졌다.
결국 이 씨는 친구들에게로 사기 대상을 확대했다. 이 같은 수법으로 이 씨가 2003년 10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고교 동창 5명 등 지인들에게 빌리거나 ‘투자’받은 돈은 3억여 원.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챙긴 돈까지 합하면 무려 7억 원이 넘었다. 이 씨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초기에는 고리의 이자를 쳐서 돈을 돌려주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의 사기행각은 비단 돈을 챙기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이 씨는 지난 2001년 카센타를 운영하는 중학교 동창에게도 국정원 직원이라고 속여 결혼했다. 이 씨는 주례에게도 자신을 정부기관 공무원으로 소개하도록 부탁, 하객들은 물론 양가 친척들까지도 아무 의심없이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 씨의 철저한 이중생활은 결혼 후 두 아이를 낳고 난 뒤에도 계속됐다. 결혼한 지 6년이 지나도록 이 씨의 생활은 미스터리 그 자체였다. 남편은 이 씨와 한 집에 살면서도 아내의 스케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무직인 이 씨는 수시로 늦잠을 잤다. 하지만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남편은 매번 늦잠을 자는 아내가 걱정스러워 이 씨를 깨우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 씨는 남편에게 “특수업무를 하는 비밀요원이기 때문에 특정 업무가 있을 때 호출이 온다” “비밀요원은 원래 출퇴근이 자유롭다” “특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기간이다”는 식으로 변명을 해 위기를 넘겼다.
또 이 씨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의심하지 않도록 아이 백일잔치와 돌잔치는 물론 자신이 입원했을 때에도 ‘국정원 직원 일동’이라고 쓰인 화환과 꽃바구니를 스스로 배달시키는 치밀함을 보였다. 심지어 허위로 사람을 내세워 남편과 친구들에게 국정원에서 자금담당을 하고 있는 동료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간혹 주변 사람들이 국정원 업무에 대해 물으면 이 씨는 ‘함부로 물어보지 마라’는 말로 일관했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국정원법과 보안규정 등을 보여주며 “비밀사항에 대해 발설하면 국정원법에 의해 처벌된다”고 겁을 주고 입단속을 시켰다. 이따금 남편이 급여 액수 등을 묻기도 했지만 이 씨는 ‘보안사항이니 알려 하지 말라’며 오히려 주의를 주곤 했다. 또 명함이나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씨는 “비밀요원은 그런 것이 없다”며 되레 면박을 주었다.
이 씨는 그간 사기행각으로 끌어들인 돈을 펑펑 써대며 그야말로 럭셔리한 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는 마땅히 할 일이 없자 한때 전문대에 등록해 다니기도 했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그만뒀다고 한다.
결국 이 씨의 사기행각은 ‘국정원 직원을 사칭하고 다니는 여성이 있다’는 제보가 사정기관 첩보망에 들어오면서 꼬리가 잡히게 된다. 이 씨는 경찰에 두 차례 소환되어 조사를 받을 때까지도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다가 세 번째에서야 범행 일체를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조사를 받으면서도 경찰에게 “비밀요원이라 국정원 직원 명단에 없다” “국정원 직원에게 함부로 해도 되느냐”며 큰소리를 쳐 경찰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다는 것.
이 씨는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가는 순간에도 가족들에게 “내가 지금 비밀리에 진행 중인 일이 있다” “걱정하지 마라. 금방 돌아오겠다”고 거짓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경찰청에서는 ‘우리 며느리는 정말 국정원 비밀요원이 맞다니까요’ ‘우리 아내는 비밀 정보요원이 확실합니다. 남편인 제가 모를 리 있습니까’라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탄원이 이어지는 웃지 못할 장면도 벌어졌다.
과시욕으로 시작된 이 씨의 영화 같은 사기행각은 경찰의 집요한 추적에 결국 8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