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동의를 위한 인사청문회가 시작된 지난 10일, 야당 의원들에 의해 ‘조리돌림’ 수준으로 난타당하는 이 후보자의 모습을 지켜본 친박계 고위 인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답이 안 나온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후보자 발탁은 지지율 30%선이 무너질 정도로 취임 후 최악의 수렁에 빠진 박근혜 대통령이 위기 탈출을 위해 내놓은 ‘깜짝 카드’였지만 인사검증의 높은 파고에 사실상 패착이 되고 말았다는 한탄이었다. 이 인사가 바둑에서 ‘버리는 돌’을 의미하는 사석이라는 표현까지 거론한 데에는 이완구 카드의 실패가 앞으로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상당한 타격과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암울한 전망이 깔려 있었다.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가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이완구 청문회’를 지켜본 청와대 내부의 반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선 이완구 카드를 통한 인적쇄신 효과가 사라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지난 1월 23일 청와대가 김기춘 비서실장과 이재만·정호성·안봉근, 이른바 ‘문고리 권력 3인방’ 유임, 수석비서관 3명 교체, 특보단 신설 등과 함께 이완구 총리 지명 사실을 발표한 것은 대부분의 여권 인사들에게도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정홍원 총리가 여야 원내대표의 임기가 끝나는 5월 초까지는 유임될 게 확실시됐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 총리는 바로 전까지 총리와 경제·사회부총리가 매달 두 차례씩 정례적으로 만나 국정 현안을 논의하겠다고 밝히는 등 총리직 수행에 의욕을 보여 왔다.
이 때문에 이완구 총리 후보자 발탁은 김기춘 실장과 문고리 3인방 유임을 상쇄하기 위한 카드로 여겨졌다. 박 대통령이 지지율 급락 추세에 제동은 걸어야겠고, 김 실장과 문고리 3인방은 교체할 수 없고 하니 일단 급한 불을 끄는 차원에서 이완구 카드를 통해 여권 전체의 인적개편이 시작됐음을 알렸다는 것이다. 미흡한 청와대 쇄신을 커버하기 위한 일종의 묘수였던 셈이다.
4월 임시국회에서 공무원 연금 개혁안 등 주요 법안이 처리되면 오는 5월 쯤 총리 교체를 포함한 개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는 점에서 이완구 카드는 시기를 몇 달 앞당긴 조기 등판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그러나 이완구 후보자 발탁이 또 하나의 ‘인사참사’, 인사실패 사례로 평가받게 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처지는 더욱 군색해졌다. ‘도대체 뭘 쇄신했느냐’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초유의 청와대 문건 유출과 측근 간 권력암투, 여기에 연말정산 파동까지 겹치면서 한때 콘크리트에 비유됐던 고정 지지층까지 다 무너져 내렸는데도 박 대통령이 외부의 쇄신 요구에 제대로 된 응답을 하나도 못한 꼴이 됐다.
문제는 인적쇄신 효과의 퇴색이 이완구 카드 실패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 중 일각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친박계 인사들조차 “인적쇄신이 기대에 못 미친 것은 이미 벌어진 일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후유증이 더 큰 문제”라는 우려 섞인 반응을 내놓고 있다. 박 대통령이 이완구 카드를 묘수로 삼아 달성하려 했던 다각도의 정치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우선 ‘충청 총리론’이 무력화됐다. 이완구 발탁을 통해 대한민국의 중원에 해당하는 충청 민심을 잡을 수 있다면 급격히 무너지는 지지층 붕괴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때마침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경선 도중 ‘호남 총리론’을 꺼내면서 충청지역에서 강한 역풍을 맞는, 예기치 않았던 호재도 있었다. 그러나 이완구 후보자가 인사검증 과정에서 만신창이가 되는 바람에 이런 정치적 효과는 사라졌다는 게 중론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완구 카드를 통해 기대됐던 소위 ‘이이제당(以李制黨·이완구 총리로 당을 제압한다)’ 효과가 물 건너갔다는 게 박 대통령에게 더 뼈아프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 친박계의 핵심 인사는 “박 대통령이 이완구 후보자를 총리감으로 낙점한 이유는 그가 원내대표로서 보여준 업무 수행 능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라며 “세월호 특별법 등 민감한 현안을 놓고 야당과 협상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김무성 대표가 불씨를 댕긴 개헌론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 강단을 보여준 게 박 대통령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말했다.
이는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등 소위 비박계 ‘K·Y 라인’이 장악한 여당을 견제하는 데 이완구 총리 카드만큼 효과적인 묘수는 없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이완구 후보자 지명 이후 여당은 물론 청와대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책임총리제 실현 가능성이 제기됐다. 당시 한 청와대 관계자는 “책임총리제는 법적인 개념은 아니고 총리가 된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실현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것”이라며 “힘 있는 총리가 들어선다면 자연스럽게 책임총리처럼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홍원 총리와는 정치적 위상이나 스타일이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총리가 들어서 여당과의 조율을 책임지고, 대통령과 청와대는 한 발 물러나 정치적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총리에 취임하기 전부터 만신창이가 된 이완구 후보자가 책임총리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게 됐다. 지난 2월 10일 긴급 당청회동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 여당 지도부에 현안 관련 협조를 당부한 것처럼 당분간 여당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새누리당 내에서는 “대통령-당대표, 대통령비서실장-원내대표 간의 소통 채널이 상설화돼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여당이 청와대와의 ‘직거래’를 통해 국정운영을 리드해야 한다는 얘기다.
매월 두 차례씩 열기로 한 당·정·청 정책조정협의회를 유승민 원내대표가 주재할 가능성이 대두되는 것도 이런 차원이다. 2·10 당청회동에서 설치하기로 합의된 당·정·청 정책조정협의회에는 새누리당에서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 원내수석부대표가 상시 멤버로 참석한다. 정부에서는 경제부총리와 사회부총리, 국무조정실장이, 청와대에서는 정책조정수석, 정무수석, 경제수석이 고정 멤버다. 당·정·청 3자가 모이는 회의를 청와대도, 정부도 아닌 여당에서 주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당의 입김이 커진다는 의미다.
만기친람 리더십으로 2인자를 두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의 스타일을 감안할 때 이런 식의 여당 주도 국정운영이 오래 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은 또 하나의 우려 지점이다. 당장은 급한 불을 꺼야 하는 상황이지만 박 대통령이 후속 개각과 청와대 개편을 마무리하면 다시 국정 장악력을 높여갈 것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당청 충돌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새누리당 친박계의 한 초선의원은 “이제 겨우 임기 2년이 지난 대통령과 1년 뒤 총선을 앞둔 여당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며 “어느 정도 힘을 갖춘 총리야말로 청와대의 구심력과 여당의 원심력이 충돌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완충지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적임자인데, 이런 기대감이 사라졌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이완구 카드의 패착이 박근혜 대통령은 물론 새누리당 정권에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떨칠 수 없는 이유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