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정배 대표(왼쪽)와 문재인 수석. | ||
최근 정치권 일각에선 노무현 정부 탄생의 주역들인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문재인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의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그동안 별다른 ‘갈등’이나 ‘충돌’이 없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최근 들어 “두 사람이 갈등을 빚고 있다” “서먹서먹한 관계가 됐다” “소원해졌다”는 따위의 말들이 나도는 것일까.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느닷없이 ‘천-문 갈등설’이 정치권에 퍼지고 있는 것일까.
소식통에 따르면 정부가 대통령 직속기구인 부패방지위원회(부방위) 산하에 설치하려고 추진하는 ‘공직부패수사처’(공수처)의 수사대상을 어느 선까지 포함시킬 것이냐가 갈등원인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대통령의 친인척을 공수처 수사대상에 포함시킬 것이냐를 놓고 두 사람이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천 대표는 야당과의 원만한 합의를 위해서라도 대통령의 친인척을 수사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문 수석은 반대편에 서 있다. 대통령의 친인척을 수사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게 문 수석의 복안이다. 여기에 검찰이 독점하고 있는 기소권을 “공수처에도 부여해야 한다”는 여당 입장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부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9월24일 부방위는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전담기구로서 공수처를 설치하는 내용의 ‘공직부패수사처의 설치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해 입법 예고했다. 공수처는 한때 ‘고위공직자 비리조사처’(고비처)로 지칭됐다. 그런데 자칫 모든 고위공직자가 비리에 연루된 것처럼 인식될 우려가 있어 명칭이 공수처로 변경됐다.
그런데 공수처의 수사 대상을 어느 선까지 규정할지를 놓고 당·청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부방위는 공수처 수사 대상 고위공직자로 경무관급 이상의 경찰 공무원과 국정원·감사원·부방위 국장급 이상, 대통령비서실 비서관과 경호실 부장급 이상, 국세청 국장급 이상과 지방국세청장, 대통령 임명직위 공직유관단체장, 지방자치단체장 등이 포함돼 있다. 그러면서 공수처에 기소권은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한나라당이 반발하고 나섰다. 지난 국회 국정감사에서 “대통령 직속기구인 부방위 산하에 공수처를 설치하면 대통령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 뻔하다”며 공수처 설치법안 백지화를 주장했다. 그럼에도 여당이 공수처 설치를 강행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여당이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관철시킬 수 있기 때문.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만약 정부와 여당이 공수처 설치를 강행하더라도 대통령 친인척을 수사대상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도 공수처의 수사대상으로 대통령 친인척을 비롯해 차관급 이상과 법관, 검사, 기초단체장 등을 잠정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이런 내용의 당 초안을 가지고 최근 천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와 문재인 수석이 만나 당·청간의 사전 조율 작업을 가졌다. 그런데 문 수석이 대통령 친인척을 수사 대상에서 제외시켜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고 말했다.
문 수석은 ‘공수처는 공직자를 대상으로 수사해야 하는데, 대통령 친인척은 공직자가 아니지 않느냐’며 수사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천 대표는 ‘DJ정부 당시 대통령 친인척을 관리하는 기관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정권이 흔들릴 정도로 타격을 입지 않았느냐’며 ‘이런 과거의 경험이 있는데 무조건 대통령 친인척을 감싸고돌면 결과적으로 대통령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는 것.
또한 현 정부 들어서도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 의혹과 관련해 여러 잡음이 들렸다는 점을 문 수석에게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천 대표 일행은 “차관급 이상 공직자 등만을 대상으로 수사할 경우 실질적인 알맹이는 빠지는 셈”이라며 “국민과 야당의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한데,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반발했다는 전언. 결국 ‘천-문’은 이날 “좀더 시간을 두고 논의해보자”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에도 문 수석은 천 대표에게 몇 차례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문 수석이 천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 친인척을 수사 대상에서 제외시켜 줄 것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천 대표가 거듭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두 사람의 사이가 소원해진 상태”라고 말했다.
천 대표측 관계자들은 이와 관련해 “천 대표와 문 수석이 갈등을 겪을 만한 일은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외부로 ‘천-문 갈등설’이 퍼지는 것을 경계하는 눈치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공수처에 기소권을 부여할 것이냐를 놓고도 당·청 간에 시소게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성진 부패방지위원장은 지난 11월12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부방위 산하에 설치될 ‘공직부패수사처’에 기소권을 부여하는 문제와 관련해 기소권이 없어도 독립성만 보장된다면 설치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정부가 공수처에 대한 기소권 부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국회 입법과정에서 기소권을 부여하거나, 당에서 기소권이 포함된 별도 법안을 제출해 법사위 심의과정에서 관철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렇듯 당·청간의 공수처 설치 법안과 관련된 갈등이 쉽게 해소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수사 대상에 대통령 친인척을 포함시키는 문제와 기소권 부여 여부에 대한 당·청 갈등이 쉽게 좁혀질 것 같지 않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공수처 설치 법안에 대한 국회 논의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여당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공수처 법안을 통과시킨다는 방침을 갖고 있지만 당론조차 확정짓지 못하고 있는 상태. 아무래도 청와대와의 ‘합의’ 없이 무리하게 추진하기엔 부담이 따르기 때문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