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간의술의 대가로 불렸던 장병두 옹이 2006년 무면허 의료행위로 신고당했다. 2007년 항소심에 출두하는 장 씨. | ||
비방을 전수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장 씨는 “사람마다 상황이 다른데 환자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내가 적어놓은 글만 믿으면 위험해. 오직 공부에 열중하여 이치를 터득한 사람에게만 비방을 전해줄 수 있다”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젊은 시절 상해에 권투선수 매니저로 갔다가 등창에 걸린 중국인을 고쳐준 일화도 소개했다. 당시 장 씨는 무일푼으로 곤란한 상황에 몰렸는데 외조부한테 배운 비법으로 중국인을 고쳐준 뒤 무사히 귀국했다고 한다.
이것이 최초의 의료행위였다고 장 씨는 털어놨다.16세 때부터 배가 고파 산에서 풀뿌리를 먹다가 약초 3000가지를 연구했다고 말하는 장 씨는 자신이 직접 풀뿌리를 씹어 먹거나 동물에게 먹여 상태를 관찰하며 독초와 약초를 구분했다고 한다. 장 씨는 “훌륭한 의원일수록 독약을 잘 써야 한다”며 “그중 가장 까다로운 수은의 독을 없애는 작업은 구증(아홉 번 찌고 말리기)을 하며 40일을 고생해야 할 정도로 지극한 정성이 필요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손금과 관상을 통해 환자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운 것도 장 씨의 의료 비법 중 하나다. 젊은 시절부터 손금, 점술, 관상을 공부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였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타자 그는 백정들을 돈 주고 사서 저잣거리에서 자신을 선전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번은 전북 김제에 사는 만석꾼의 동생 조재남 씨의 상을 읽어 그의 죽음을 예견하고 알아맞히자 그 일대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 제법 많은 돈을 번 적이 있다고 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에 객식구로 머물던 ‘임학 선생’과의 기이한 인연에 대해서도 털어놓고 있다. 장 씨에 따르면 임학 선생은 둔갑과 축지법에 통달했던 기인이다. 장 씨는 “선생님이 나를 제자로 삼고 싶어 하셨다”며 “산에 데리고 다니면서 약재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가르쳐줬다”고 말한다. 임학 선생의 기행에 대해 장 씨는 “한겨울에 잉어를 구해오거나 방에 같이 앉아 있다가도 어느새 없어지고 ‘억’하면 그릇이 나오고 또 ‘억’하면 쌀이 생겼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장 씨는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자신의 수련법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장 씨는 17세부터 ‘육경신’이라는 독특한 수련을 시작했다. 경신이라는 말은 60갑자에서 유래한 말로, 1년에 여섯 번 있는 경신일을 말한다. 장 씨는 경신일마다 잠을 한숨도 자지 않고 수련했다고 한다.수행은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장 씨는 1년을 못 채우고 실패를 거듭하자 오른손에 칼을 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수련을 하다가 졸음에 못이길 것 같으면 왼손을 찍어버리기도 해 아직도 그때 생긴 흉터가 여러 개 있다고 밝히고 있다.
장 씨는 <주역>과 음양의 원리를 깨달아 의술의 근간으로 삼았다. 병이 생긴 이유와 ‘반대로 하면’ 8할의 병은 치료된다며 밥 먹고 체했으면 밥을 태워서 그 가루를 먹으면 되고, 돼지고기 먹고 체했으면 돼지고기를 태워서 먹으라는 식이다. 장 씨는 자연을 관찰하는 버릇을 통해 자연스럽게 물리가 트였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원리를 기본으로 서양의학에서도 못 고치는 병을 자신은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장 씨는 “의사들은 상생의 이치를 모른다”며 “눈에 보이는 장기만 다루지 말고 간이 나쁘면 심장과 신장도 같이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책을 통해 민중의술을 의료법이라는 족쇄로 묶어놓고 비과학적이라는 낙인을 찍은 것에 분노하면서 치료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하며 수십년간 연구한 자신의 치료법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했다.한편 이 책 서두에 실린 김지하 시인의 추천사도 눈길을 끈다. 오랜 수감 생활로 불면과 환청에 시달렸던 김지하 시인은 “서푼짜리 분노를 우선 멀리 쫓으시오!”라는 장 씨의 충고와 함께 약을 처방받아 완쾌한 경험을 소개했다.
이윤구 기자 trust0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