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2년 지방분권촉구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박형준 의원(왼쪽에서 두 번째). 이때 그는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부산지역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 ||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은 순진한 문학청년이었다. 그는 고려대 사회학과에 재학할 때 <고대문화> 편집장을 맡으면서 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고교 때는 박완서 이병주를 좋아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이청준 황석영이 그의 ‘벗’이었다. 하지만 문학청년 박형준은 79년 10·26 뒤 80년 서울의 봄을 목도하면서 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리고 5공의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면서 그는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에 남아 이론 공부를 계속하라”는 친구들의 권유를 받고서다. 하지만 그는 애초부터 교조주의적인 학생 운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특히 주사파의 태동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당시 많은 동료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지만 ‘이건 아니다’는 생각은 분명했다”고 말했다. 그 뒤 그는 88년에 유럽에 머물며 동구 몰락을 지켜보면서 운동권과는 이별을 하게 된다.
박 의원은 <중앙일보>에 2년 정도 재직한 뒤 다시 대학에 돌아가 박사학위를 따고 올해 총선 전까지 동아대 교수로 재직해왔다. 그는 부산에 내려온 뒤 ‘지방분권’을 화두로 지역 활동에만 전념했다. 2002년에 지방분권 부산운동본부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지방화 시대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는 이에 대해 “지방에 있으면 지방 문제가 보이지만 서울에 있으면 지방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된 지방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지방분권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 의원이 지방분권과 함께 분명한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 ‘경세의 정치’다. 그는 “이제는 산업화 민주화 다음 단계인 선진화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국가 경영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 싸우고 헐뜯는 정치로는 선진화는 요원하다. 서로 존중하고 타협하는 국가 경영의 정치만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정치 실종에 대한 해답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