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박근혜 대표(오른쪽)가 당내 국보법개정안특위 간사인 장윤석 의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한나라당은 이번 사건을 이 의원 사건 규명에 초점을 맞추어 여권 일각의 386 의원들에 도덕적 타격을 입히고 나아가 국가보안법 공방에서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을 짜고 있다. 반면 한나라당의 ‘기습’에 허를 찔린 열린우리당은 사건 초기만 해도 해명에 급급하던 소극적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야당의 ‘의도’를 간파한 뒤부터는 과거의 용공 고문 조작 사건을 모두 파헤쳐 한나라당의 색깔론을 차단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에도 정당성을 확보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한편 이철우 의원이 가입해 활동했던 민족해방애국전선이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과 동일체인지의 여부에 따라 여야의 공안 전쟁 승패에 중대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앞으로 제2, 제3의 이철우 사건을 공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향후 정국은 그야말로 시계제로다.
한나라당에서 주간 <미래한국>의 이철우 의원 간첩 의혹 보도를 처음 접한 사람은 이방호 의원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방호 의원은 이에 대해 “정형근 의원에게 사실 확인을 한 뒤 원내대표단에게 기사를 복사해 돌리고 당 차원의 문제제기 필요성을 제기했으며 원내대표단은 본회의 5분 발언 등을 통해 이를 폭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일부에서는 한나라당이 여권의 과거사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이번 이 의원 사건을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법사위원들을 중심으로 지난 11월부터 과거 공안사건들에 대한 수사·재판기록을 법원에 요구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
하지만 한나라당에서는 사전 기획설에 대해 손사래를 친다. 한나라당 법사위 간사 장윤석 의원은 이에 대해 “한나라당 차원에서 요청한 것은 없고 법사위원 개개인이 나름의 필요에 의해 요청한 것으로 안다”라며 “자료제출은 수시로 하지 않나”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이철우 의원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한나라당이 <미래한국> 보도를 접한 뒤 국보법 정국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판단해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않고 국회 5분 발언을 통해 서둘러 사건을 확대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사건 다음날 기자에게 “어제 주성영 의원 등이 이 의원에 대한 간첩 의혹을 제기했지만 좀 성급했다는 생각도 든다. 언론 보도에 대해 좀 더 정밀한 확인을 한 뒤 의혹을 제기했어야 했다. 사전에 기획을 했다면 그렇게 갑자기 준비해서 터뜨리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럴 경우 이철우 사건을 통해 정략적으로 색깔론을 확산시키려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편 이번 사건의 최대 쟁점은 이철우 의원이 과연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느냐에 달려 있다. 여권은 이 의원이 가입했던 민족해방애국전선(민해전)이라는 조직은 안기부가 고문 조작으로 만든 것일 뿐 이 의원과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고문 조작 주장은 앞으로 많은 조사가 이루어져야 함으로 일단 논외로 한다.
이에 반해 한나라당은 재판부의 판결문을 근거로 ‘민해전은 중부지역당의 또 다른 명칭일 뿐 같은 조직이고 조선노동당 산하 단체로서 이 의원이 만약 여기에 가입했다면 조선노동당 당원임이 확실하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 정형근 의원. | ||
1심 재판부는 “간첩단의 명칭을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라고 볼 증거가 없고 피고인들의 주장대로 민해전인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결해 이 의원이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사실이 없음을 우회적으로 밝히고 있다. 당시 언론은 이에 대해 “안기부 검찰은 발표 당시 문제의 간첩단이 북한의 노동당과 직접 연계된 조직임을 강조하기 위해 과대포장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 관계자들은 이 같은 판결이 결국 검찰이나 안기부 등 수사기관의 신뢰도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고 사건이 조작됐다는 인상을 받도록 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었다. 당시 검찰의 한 고위관계자는 “수사결과 관련 피의자들이 사용하는 민해전은 남한 노동당 중부지역당의 위장 명칭이고 북한에서 하달한 지령문도 입수돼 있다”며 “주범인 황인오 피의자의 경우 보도진이 지켜본 강화도 현장검증 때도 이 명칭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관련 피고인들이 중부지역당 명칭을 극구 부인하는 것은 중형을 면하기 위한 전술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재판부가 중부지역당 실체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했지만 민해전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조직(민해전)이 북한의 지시를 받고 결성된 뒤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와 노동당기를 걸어놓고 조직원들에게 가입선서를 시키는 등 명백한 반국가단체임이 인정된다”고 밝혀 이 의원에게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선고했던 것이다.
그런데 항소심에서는 약간 다른 결과가 나왔다. 황인오씨에 대해서는 검찰의 기소 내용을 모두 유죄로 인정해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의 실체를 모두 인정했다. 이것이 한나라당이나 공안 관계자들이 “이 의원이 알았든 몰랐든, 그는 노동당과 연계된 하부조직에 가입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다.
하지만 황씨와는 다른 재판부가 담당한 이철우 의원 사건에서는 이 의원의 민해전 가입 사실만이 유죄로 인정됐을 뿐 민해전과 중부지역당과의 관계는 별도의 판단이 내려지지 않았다. 바로 이 점에서 여야의 첨예한 논쟁이 있을 전망이다. 앞으로 한나라당은 당시 재판부가 판단을 내리지 않은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파헤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가 “이철우 의원이 가입해 활동했던 반국가단체인 민족해방애국전선(민해전)이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과 동일체인지를 공개검증하자”는 주장을 계속 하는 이유도 민해전이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의 또 다른 이름일 경우 이 의원은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에는 중부지역당 총책이었던 황인오씨의 자서전에도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철우 의원을 ‘포섭’했던 인물로 알려진 양홍관씨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대협 1기와 반미청년 활동으로 깊은 신뢰를 쌓았던 이철우 의원에게 92년 4월 ‘조국통일애국전선’ 참여를 권유해 6월 가입시켰다”면서 “이철우 의원은 상부조직인 민족해방애국전선을 전혀 몰랐고 민해전 중앙위원이었던 나도 역시 중부지역당이라는 명칭을 안기부로부터 처음 들었다”고 밝혔다.
▲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한나라당의 ‘간첩’ 공세에 대해 지난 9일 국회 앞에서 규탄대회를 가졌다.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철우 의원. | ||
양씨가 이 의원을 민족해방애국전선이 아닌 조국해방애국전선에 가입시켰기 때문에 민해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중부지역당이나 민해전이나 조국해방애국전선이나 모두 같은 조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 정작 황씨 본인은 극구 부인하고 있다. 그는 자서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첨삭 가필되었기 때문에 책 내용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원고지로 치면 한 2천장 가량 되는데 첨삭되고 (가져간 사람들) 마음대로 뺄 건 빼고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황씨는 자신이 당시 ‘민족해방애국전선’(민해전)의 총책임자 역할을 했다는 점에 대해선 부인하지 않았다. 황씨는 특히 “민해전은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의 위장 명칭인 것은 사실이지만 철저한 비밀 사항으로 조직 최상부만 알고 있어서 이 의원은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의원은 이런 모든 사실에 대해 “고문에 의해 이뤄진 거짓”이라고 부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의원의 이런 주장에 대해 당시 항소심 재판을 맡았던 K변호사는 “당시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자기주장을 못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오히려 재야 인사들이 법정에 몰려와 판사들이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고 당시의 법정 분위기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의원의 변론을 맡았던 법률사무소의 대표였던 열린우리당 유선호 의원은 “당시 상황에서 고문은 거의 당연한 것이었다”며 반론을 펴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이 이번 이철우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열린우리당 386 의원 중 일부가 주사파 전력이 있는 것에 주목하고 이들을 향해 공세를 펼칠 것이라고 전망한다. 최근 정형근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의원처럼 조선노동당 사건에 관련된 분들이 여당에 국회의원으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또한 한나라당 법사위원들은 지난 11월부터 주사파와 관련된 시국사건 재판 결과를 법무부에 계속 요구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씨(반미청년회사건), 유시민 의원(서울대프락치 사건) 등 여권 인사들과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과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구국학생연맹사건) 등이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한나라당은 사태 추이에 따라 언제든지 제2, 제3의 이철우 사건을 터뜨릴 기세여서 이번 ‘붉은 바람’은 해를 넘겨서도 강하게 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