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지지율 제고 프로젝트’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왼쪽)의 주미대사 발탁이 이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한다. 지난 2월 청와대 회동 모습. | ||
20%대로 떨어진 현재의 지지도를 회복하지 않는 한 ‘성공한 대통령’은 요원하다는 위기감의 발로에서다. 사상초유의 탄핵사태 후 4·15 총선에서 16년 만에 여당의 국회 과반 의석 확보라는 `개가’를 올린 것도 잠시,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지지율에 기존의 국정운영의 틀을 획기적으로 바꿀 것임을 예고하는 징후가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지율 제고’ 프로젝트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국정운용에서 이제까지 참여정부의 한계를 상징했던 ‘코드’를 버리고 실용주의적 면모를 강화하고 나선 점이 눈에 띤다. 반대세력은 물론 중간층으로 부터도 “‘편가르기 식’으로 국정을 이끈다” “경제나 민생보다는 정쟁적 사안에 몰두한다”라는 비판이 높았던 점을 감안해 새해에는 실용주의에 기반한 ‘경제 올인’을 새로운 국정 패러다임으로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청와대는 대외적으론 “국정운영 스타일이 바뀐 것이 아니라 노 대통령 특유의 실용주의 노선이 강화되는 것일 뿐”이라 설명하지만 상당한 변화가 진행중임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9월 중순 카자흐스탄-러시아 방문에서 부터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12월17~18일)까지 4개 대륙-13개국, 해외 체류일 32일간에 걸친 장기 해외순방이 직접적인 계기였다는 얘기도 나온다.
달라진 노 대통령의 면모는 대기업들과의 관계 재설정 움직임에서 뚜렷이 감지된다. 노 대통령은 브라질 국빈방문 기간 중인 11월18일 양국 기업인들과의 간담회에서 바뀐 기업관을 가감없이 드러낸 바 있다.
그는 “우리 기업이 독재정부 시절 권력과 결탁해 금융혜택 등을 받으면서 경제를 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금을 사서 어디에 감추거나 해외 친척집에 숨기지도 않았고, 비밀계좌를 두지도 않았으며 성공한 이익을 전부 국내 기업활동에 투자했다. 오늘까지 우리 경제를 성장시켜온 것은 이 같은 우리 기업의 애국심, 확실한 한국기업의 국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발언한 바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에 전격 기용한 것도 노 대통령의 기업관의 변화와 실용주의적 면모를 드러낸 사례로 꼽힌다.
‘정경유착’ ‘권언유착’이란 비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홍 회장을 발탁한 것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등 미국내 정·재계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맺고 있는 삼성의 ‘미국 네트워크’를 국익을 위해 적극 활용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란 분석이다.
여권 핵심인사는 이를 두고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었던 덩 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을 연상케 한다”며 “홍 회장의 주미대사 기용을 놓고 구구한 해석이 나오지만 본질은 실용주의자인 노 대통령이 현 단계에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찾은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과 ‘교감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한 인사는 일련의 변화에 대해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요청에도 대기업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노 대통령이 직접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친 기업’ 성향을 과시한 것으로 본다. 이전의 대통령 스타일이라면 직설적으로 성토했겠지만 경제 사정이 워낙 어려운 만큼 채찍보다는 당근을 사용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보수층에 대한 분리-견인 전략은 프로젝트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대목이다. 핵심 고리는 ‘탈 코드 인사’의 중용 등 인사정책의 변화와 반대세력에 대한 ‘관용과 포용’, 그리고 현 정부 들어 높아진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불안감 해소다. 노 대통령에 대한 보수층의 불만이 ‘코드 인사’와 한미동맹 등 대미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하겠다.
‘홍석현 카드’는 세 가지 전략을 모두 담고 있다는 평가다. 이른바 ‘조-중-동’의 한축이었던 보수신문의 오너에 “한국 외교의 전부”라는 대미 외교를 맡긴 것은 그 자체가 파격이었던 만큼 전후방 연관효과 역시 주도면밀하게 검토됐다는 분석이다.
당장 여론시장을 ‘과점’해온 ‘조-중-동’ 카르텔이 현 정권에 대한 대응을 놓고 깨질 것이며, 이는 그동안 노골적으로 ‘반노’ 성향을 보여온 조선-동아일보의 입지 약화로 이어질 것이란 관측을 낳고 있다.
▲ 노 대통령과 DJ 사이에도 ‘훈풍’이 불고 있다. 지난 6·15남북정상회담 4주년 기념식장에서 만난 두 사람. | ||
9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적극 지지해 구설에 올랐고, 김대중(DJ) 정권에선 탈세 혐의로 구속됐던 ‘전과자’인 홍 회장을 핵심 요직에 기용해 노 대통령의 포용력을 보수층에 과시하는 효과도 노렸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아울러 보수층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 내정자와 동문관계(미국 스탠퍼드대) 등 미국내 여론주도층에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다는 홍 회장의 발탁으로 삐걱대는 인상을 주고 있는 한미관계가 안정될 것이란 기대감을 갖도록 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는 얘기도 덧붙여진다.
여권내에선 ‘합리적 보수층’을 견인하기 위한 노 대통령의 노력이 내년 초 개각와 향후 정부 인사를 통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당장 양도세 중과세 시기 연기를 주장해 여권내 개혁그룹으로 부터 파상공세를 받았던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유임이 결정된데 이어 정부내 대표적인 ‘코드 장관’으로, 교체설이 나오는 허성관 행정자치-지은희 여성부 장관의 후임으로 보수층에 어필할 수 있는 인사가 기용될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 노 대통령은 최근 들어 ‘관용론’을 내세워 보수층 포용 의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각별한 정성을 모아 관용의 문화를 만들지 않으면 실패할지 모른다”(12월13일 민주평통 운영-상임위 합동회의), “나와 다르다는 것뿐 아니라 틀린데 대해서도 그것을 수용하고 설득하고 포용해 가는 것이 관용이며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겠다”(12월14일, 기독교방송 창립 50주년 축사)는 등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확고한 지지를 보냈던 이른바 ‘전통적 지지층’의 복원도 지지기반 확충을 위한 핵심과제 중 하나다. 주요 기제는 북핵 해결의 이니셔티브 장악과 DJ-민주당으로 표상되는 호남 정치세력과의 관계개선이다. 전자를 통해선 현 정부의 정체성에 회의를 표시하며 떨어져 나간 개혁 성향의 지지층을, 후자로는 대선 승리의 핵심기반이었던 호남권을 다시 확고히 틀어쥐겠다는 의도란 해석이다.
우선 북핵과 관련해 노 대통령은 해외순방 기간 중 평화적 해결을 위해 ‘올인’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북한의 핵이 자위수단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11월13일, 미국 LA 동포간담회)→“중국이 돕고 한국이 원치 않기 때문에 북한 붕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같다”(12월4일, 폴란드 바르샤바 〃)→“(북한) 붕괴를 원치 않는 중국과 한국과, ‘레짐 체인지’(정권교체)를 해야 된다고 하는 나라들 사이엔 손발이 안 맞게 돼 있다. 손발이 맞지 않으면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다”(12월6일, 프랑스 〃) 등 일련의 북한 관련 ‘메가톤’급 발언은 외교적 파장 못지 않게 국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노 대통령의 ‘북한 시리즈’ 발언은 등 돌렸던 개혁진영으로 부터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이라크 파병과 용산기지 이전 문제 등을 놓고 대미 관계에서의 ‘저자세’를 공박했던 민주노동당에선 “모처럼 괜찮은 이야기를 했다”(권영길 의원)는 평가가 나왔고, 역시 정부와 소원한 관계가 계속됐던 개혁적 시민-사회단체에서도 대부분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DJ와의 관계가 노 대통령 취임 이후 가장 좋은 국면을 맞게 된 것도 괄목할 만한 성과로 평가된다. DJ는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현 정부의 노력은 아주 옳은 것으로 초당적으로 지지해야 한다”(12월10일, 청와대 문재인 시민사회-정찬용 인사수석과의 면담)며 보기 드물게 노 대통령을 ‘극찬’했으며 측근 인사들에게도 “노 대통령이 남북문제에 무관심한 줄 알았는데 ‘기우’여서 다행이다”며 신뢰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교동계 출신이면서 노 대통령의 측근인 여권 인사는 “대북 송금 특검과 민주당 분당 사태로 틀어졌던 두 분 사이가 요즘처럼 좋았던 때가 없었다. 노 대통령에 대한 DJ의 불신이 완전히 해소됐다는 느낌이며 이같은 분위기는 앞으로 여러 의미있는 성과로 이어질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노 대통령-DJ간 ‘밀월’은 전-현직 대통령간 화해의 차원을 넘어 호남권을 양분하고 있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는 부수효과를 낳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미 열린우리당이 ‘정치 도의’를 내세워 민주당이 떠안은 대선 빚 변제를 추진중인데 이어 동교동계 출신으로 대표적인 ‘통합론자’인 문희상 염동연 의원이 차기 당 지도부 진입이 유력시되면서 양당 관계 역시 분당 이후 가장 좋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실제 염 의원은 “이제 산토끼는 그만 쫓고 집토끼를 묶어 키워야 할 때이며 여권의 지지기반을 확고히 해야 한다”며 통합에 의욕을 보이고 있고, 친노 386그룹내에서도 “양당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얘기는 여러모로 좋은 얘기”(서갑원 의원)라며 공감을 표시해 주목을 끌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