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 원대에 달하는 대형 M&A(인수·합병)에 정치권이 연루됐다는 내용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상당한 파문이 예상된다. 더군다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사장까지 맡았던 현대건설은 ‘친 MB 기업’으로 분류되는 곳이다. 최근 대기업 사정 드라이브를 걸며 지난 정권을 겨냥하고 있는 검찰에서도 관련 첩보를 입수, 내사를 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건설 인수전을 가리켜 재계에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했다. 규모나 자금력에 있어서 현대차그룹이 압도적으로 현대그룹보다 우위에 있었던 까닭에서다. 현대그룹이 TV 광고를 통해 현정은 회장 남편 고 정몽헌 회장을 내세우는 등 적극적이었던 반면, 현대차는 비교적 조용한 대응으로 일관했다. 현대차 입장에선 현대그룹과 다투는 모습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여유 있는 승리를 점쳤던 때문으로 관측된다. 채권단 내부에서조차 현대차 낙승을 점치는 분위기가 파다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0년 11월 16일 채권단은 현대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발표했다. 현대그룹은 현대차보다 4000억 원가량 많은 5조 5000억 원을 써내 입찰에서 승리했다. 현정은 회장의 과감한 ‘베팅’이 주효했던 셈이다. 현 회장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던 날 선영을 찾아 “고인들도 기뻐할 것”이라며 감격에 겨워했다. 방심하다 다윗의 일격에 패한 현대차는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당시 현대차 고위 임원은 “현대그룹보다 절박함이 덜 했던 것 같다. 현대그룹이 얼마를 써낼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마무리단계로 접어들던 인수전은 현대그룹 자금 조달 방안에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드러나면서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번엔 현대차가 거센 역공을 폈다. 현대차는 소송까지 불사하겠다며 현대그룹 자금 출처에 대한 증빙자료를 요구했다. 또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과의 거래를 끊는 등 실력행사도 나섰다. 채권단 기류가 급격하게 바뀐 것도 이 무렵부터다.
당시 인수전 상황에 정통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현대그룹이 제출한 자금 조달 서류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확실해보였다”면서 “이것을 면밀히 체크해보라는 요구가 윗선에서 계속 내려왔다. 금융기관 고위 인사들도 비슷한 주문을 채권단에 여러 차례 했다. (채권단으로선) 이를 거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채권단 의사 결정에 외부의 압력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점칠 수 있는 대목이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여권이었던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몇몇 의원들이 사실상 현대차그룹과 비슷한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국회가 민간기업 M&A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례적이다. 2010년 11월 24일 국회 정무위원회는 한나라당 요구에 따라 현대건설 매각을 정식 안건으로 상정해 논의를 했다.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일부 의원들은 이 문제를 국회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 자체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피력했다.
박선숙 당시 민주당 의원은 “현대건설 현안보고가 어떻게 해서 정무위원회 의사일정으로 잡힐 수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 이진복 의원도 “국회가 지금 특정 업체를 도와주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느냐라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정도로 부당하게 하고 있다. 시장에 맡겨서 주관사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 출신의 이진복 의원은 현정은 회장 외삼촌이기도 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핵심 라인으로 분류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대부분 의원은 “현대그룹 자금 조달 능력에 의혹이 있는 만큼 국회 차원에서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채권단을 비롯한 금융권은 물론 정치권에서조차 현대그룹을 옥죄어갔고, 결국 현대건설은 예비협상대상자였던 현대차 품에 안겼다. 이 과정에 법정공방도 벌어졌지만 대세는 바뀌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인수전에 깊숙이 관여한 현대그룹 측 전직 고위 인사는 기자와 만나 “MB 정권의 횡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손에 넣었던 현대건설을 빼앗길 위기에 놓이자 현대그룹은 자체적으로 그 배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보이지 않는 손’이 현대건설 매각에 개입돼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앞서의 현대그룹 전직 고위 인사는 “강남의 한 호텔에서 매일 사람을 만나 정보를 수집했다. 인수전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고 주장했던 야당 의원 쪽 보좌관도 포함돼 있었다. 결론은 매각이 정치적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됐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대그룹 컨소시엄에 참여했던 한 투자자 역시 “음식을 입에 넣어 씹기 직전 누군가 뒤통수를 쳐서 억지로 토해내야 했던 상황이었다. 시중에 알려진 것처럼 현대그룹 자금 출처가 아주 의심스러운 것도 아니었다”면서 “당시 우리는 현대차와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정권 실세들이 채권단 및 금융당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파악했다. 믿기 힘든 제보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그 커넥션을 파헤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이러한 내용들이 현대그룹의 일방적 주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이에 <일요신문>은 당시 매각에 관여했던 복수의 관계자들을 상대로 진위 여부를 취재하던 중, 뜻밖의 정황을 포착할 수 있었다. 검찰이 2012년 초 현대건설 인수를 둘러싸고 정권 실세들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살펴보기 위해 은밀히 내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정보를 다루는 수사관들이 채권단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접촉해 진술을 얻어내고, 자료를 확보했다고 한다.
해당 자료엔 이명박 대통령 당선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 외곽 조직 선진국민연대 출신 금융권 인사가 현대차에 유리하게 이뤄지도록 힘을 썼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현대그룹 전직 고위 인사 역시 그를 현대차와 정치권 간 연결고리로 지목했다. 또한, 몇몇 정권 실세가 현대차로부터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도 담겨져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이 조직적으로 현대차에 힘을 실어주려 했다는 게 당시 내사의 핵심 내용이다.
검찰은 2013년 하반기에도 현대건설 매각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확인 작업을 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중앙지검 고위 관계자는 “2013년 8월에 현대건설을 압수수색한 적이 있다. 4대강 사업 담합 및 비자금 조성 의혹을 수사하던 때였다. 당시 수사팀이 과거 수집했던 인수 관련 기록들도 넘겨받아 수사 여부를 검토한 적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러한 검찰의 지난 행보가 주목받는 것은 최근의 MB 정권 겨냥 사정 기류와 맞물려서다. 현대건설은 지난 정권 시절 4대강 사업에 참여하고 해외 원전을 수주하는 등 친 MB 성향으로 분류된다. 특히 매각 당시 사장이었던 김중겸 전 한국전력 사장은 이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 재직시 함께 근무했던 대표적인 ‘MB맨’이다. 검찰이 포스코를 필두로 지난 정권 실세들과 대기업 간 유착 관계를 본격적으로 파헤칠 경우 캐비닛에 보관돼 있는 현대건설 매각을 둘러싼 의혹 역시 또 다시 도마에 오를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